삼부자 화해의 산행길에 노루를 만나다

회초리를 든 아이와 화해도 하고 노루도 만나고

등록 2003.12.08 12:03수정 2003.12.08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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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내내 일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모가지가 비틀어진 풍뎅이마냥 마당을 뱅뱅 돌고 있었습니다.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 집 큰 아이 인효에게 회초리를 들고부터였습니다. 올 들어 두 번째 대는 회초리였습니다.


아빠의 호통에 겁먹은 녀석의 눈망울이 자꾸만 눈앞에서 아른거렸습니다. 가슴이 탁 막혀 왔습니다. 좀 더 타일러야 할 것이었는데 후회가 막심했습니다. 작은 아이 인상이에 비해 눈치가 빠른 녀석은 태어나서 아빠에게 네 번째로 종아리를 맞았습니다.

a 큰 아이 인효에게 회초리를 대고 산고개 고개 넘어 저수지까지 산행을 함께 했습니다.

큰 아이 인효에게 회초리를 대고 산고개 고개 넘어 저수지까지 산행을 함께 했습니다. ⓒ 송성영

초등학교 2학년생인 녀석은 요즘 학교에서 돌아오면 부쩍 컴퓨터 타령이었습니다. 수요일과 일요일, 일주일에 두 차례씩 컴퓨터를 개방시켜 주고 있는데 요즘은 거의 매일 같이 컴퓨터 노래를 불렀습니다.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 있으면 눈도 나빠지고 또 가슴도 답답해져서 좋지 않으니께, 조금만 해라잉."
"알았슈."
"니가 맨날 치고 받고 쌈박질하는 컴퓨터 게임만 할려구허니께 동생이나 엄마한데 화를 자주 내구 그러는겨, 아빠가 공부만 하라고 그러는 건 아녀, 인상이처럼 그냥 마당에 나가서 뛰어 놀고 산에도 자주 올라가 신나게 놀라는 거지…."
"에이, 알았슈, 알았다니께."
"이 눔 새끼가 말은 잘한다. 너 대답만 해놓고 약속 안 지키면 이번엔 진짜루 컴퓨터 금지시킬겨."
"알았어, 쪼금만 할께."

대답은 똑 소리나게 잘해 놓고 뒤돌아서면 그만이었습니다. 요즘 손님들이 자주 찾아오는 허술한 틈을 타 거의 매일 같이 컴퓨터 아니면 텔레비전 앞에 붙박이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엄마가 텔레비전을 끄고 공부 좀 하라 하면 되려 화를 버럭 버럭 내며 문을 꽝 소리나게 닫기까지 했습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었습니다. '경고장'을 내놓았습니다.

"너, 아빠가 화내면서 말하는 게 좋아, 화 안 내고 좋게 말하는 게 좋아."
"화 안 내고 좋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파악한 녀석은 고분 고분 말귀를 알아듣는 듯싶었습니다.


"그동안 아빠가 화내고 말했어, 화 안 내고 말했어."
"화 안 내고…."
"그런데 너는 왜 매일 같이 화를 내고 그래, 그럼 엄마 아빠가 기분이 좋겠어."
"아니."
"니가 요즘 무엇 때문에 화를 자주 내고 있다고 생각해?"
"몰라."
"너도 그랬지, 싸우는 컴퓨터 게임을 하고 나면 가슴이 답답하다고…."
"응."

"아빠는 니가 화를 자주 내는 것은 바로 그 컴퓨터 게임을 자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가슴이 답답하니까 책도 읽기 싫어지고 또 공부도 하기 싫어지는 거라구. 니 생각은 어뗘?"
"나두 그렇게 생각해."
"그럼 어떻게 해야하지?"
"컴퓨터나 텔레비전을 적게 보고 책을 읽거나 밖에 나가서 노는 것을 더 많이 해야지…."
"말은 잘 한다. 이눔 새끼, 그래 좋다, 지금부터 아빠가 지켜 볼껴, 니가 약속을 안 지키면 아빠도 이제 어쩔 수 없이 회초리를 드는 수밖에 없다. 낼 모레 시험 본다고 했지, 빵점 맞아도 상관없지만 최선은 다 해야지. 이제 텔레비전 끄고 공부 좀 해."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방안으로 들어와 보니 녀석은 여전히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습니다.

"어, 이놈 봐라 아빠하고 금방 약속해 놓고 또 안 지켜…."
"에이, 알았어 알았다니께!"
"이 눔 자식이 이번에는 화까지 내! 안되겠다! 오늘 이 눔 자식 버릇을 고쳐놔야지."

회초리로 손바닥 한 대와 종아리 다섯 대를 호되게 후려쳤습니다. 녀석은 겁에 질려 있었고 나는 화를 내고 있었습니다. 나는 녀석에게 화를 내지 말라 이르면서 어리석게도 버럭버럭 화를 내고 있었습니다.

회초리를 맞은 녀석의 태도가 눈에 띄게 확 달라졌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컴퓨터 타령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도 알아서 적당히 보고 화도 잘 내지 않았습니다. 아빠 옆에 바싹 붙어 평소와는 달리 애교까지 부렸습니다. 그럴수록 내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아빠의 회초리가 얼마나 무서웠으면 이럴까 싶어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일요일. 작은 아이 인상이는 친구들과 함께 정신 없이 놀고 있었고 인효는 아빠와의 약속을 지키며 방안에서 책 한 권을 다 읽고 나서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인효야, 우리 둘이서만 인상이 몰래 도시락 싸 들고 산에 가자."

캠코더와 배낭을 메고 인효와 함께 뒷산에 올랐는데 작은 아이 인상이와 녀석의 친구들이 이미 거기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도시락을 준비하는 동안 인상이 녀석이 친구들을 이끌고 산에 올라갔던 것입니다.

a 인상이 친구들. 맨 왼쪽부터 기표 동생 기은, 인상, 기표, 동네 유일한 친구 정근

인상이 친구들. 맨 왼쪽부터 기표 동생 기은, 인상, 기표, 동네 유일한 친구 정근 ⓒ 송성영

"아빠 같이 가!"

녀석들을 쪼르르 앉혀 놓고 사진 한 방을 찍어 주고 나서 다시 산을 오르는데 인상이 녀석이 저 만치서 헐레벌떡 뒤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산에다가 학교를 지어 달라고 할 정도로 산을 좋아하는 놈이 그냥 내려갈 리가 만무했습니다.

"친구들은?"
"먼저 내려갔어."
"에이, 너는 친구들하고 놀지 왜 따라 와, 아빠하고 둘이서 오붓하게 산에 좀 가는데…."

인효 녀석은 불만이 많았지만 결국 셋이서 산행을 했습니다. 산 고개를 두 개 넘어 저수지가 보이는 곳까지 가기로 했습니다.

산 고개를 하나 넘어 지난 여름에 청둥오리 알을 발견했던 갈대 숲에서 노루와 마주쳤습니다. 노루도 놀랐고 아이들도 놀랐습니다. 지난 봄까지만 해도 어미와 함께 다니던 새끼 노루였는데 이제는 중노루가 다 되어 혼자 다니고 있었습니다.

나는 잽싸게 캠코더를 작동시켜 저만치 뛰어가는 놈을 화면에 잡았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삼부자는 산행을 하면서 수차례에 걸쳐 노루와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캠코더에 잡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a 캠코더 화면의 것을 사진으로 뽑아 놓고 보니 흐릿합니다. 자세히 보면 나무 사이로 뛰어가는 노루의 모습이 보입니다.

캠코더 화면의 것을 사진으로 뽑아 놓고 보니 흐릿합니다. 자세히 보면 나무 사이로 뛰어가는 노루의 모습이 보입니다. ⓒ 송성영

"아아, 마이크 테스팅, 지금부터 노루를 본 소감을 말해 보겠습니다. 먼저 작은 아들 인상이의 기분은 어떻습니까?"
"응, 저기, 있잖아, 시원한 거 같애."
"시원해? 왜?"
"노루가 바람처럼 빨리 달리니까 시원하잖아."

"이번에는 큰 아들 인효 소감은 어떻습니까?"
"그냥 좋아, 보기 좋고 기분도 좋아 노루를 보니까."

산 고개 고개를 넘어 저수지에 도착했습니다. 찬바람을 피해 양지 바른 산소에 퍼져 앉아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까먹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인효와 나는 예전처럼 흉허물 없는 친구처럼 사이가 좋아졌습니다. 인효는 더 이상 아빠 눈치를 보지 않았습니다. 공연히 아빠에게 애교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힘들면 힘든 대로 투정을 부리기도 했습니다.

하산 길에 인상이는 저만치 앞서서 노루 새끼처럼 펄쩍펄쩍 뛰어 내려갔습니다. 동생보다 산행이 서툰 인효는 여전히 아빠 옆에 착 달라붙어 산을 내려왔습니다.

"인효야 오늘 산에 올라가 노루도 보고 저수지도 보고 기분 좋게 도시락도 까먹고 내려오니까 기분이 좋지?"

"응. 처음에는 산에 오르기 싫은데 막상 올라갔다 내려오면 기분이 아주 좋아."

"아빠도 아주 좋다. 근데 인효야, 우리가 뭔가를 보고 느끼면 그것들이 우리 마음 속에 그대로 담아지는 경우가 많거든, 예를 들어, 싸우는 컴퓨터 게임을 자주 하다보면 그게 마음 속에 담아지게 되고 또 오늘처럼 산에 올라가서 기분 좋게 노루를 보게 되면 노루를 본 기분 좋은 마음이 담아 지게 되잖어, 그럼 그런 마음이 너도 모르는 사이에 그대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기분 좋은 것을 담으면 기분 좋은 것이 나오고 싸우고 화내고, 기분 나쁜 것을 담으면 기분 나쁜 것이 나오게 되는겨…. 무슨 얘기인지 알겠어?"

"잘은 모르겠는데 조금은 알 것 같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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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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