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25

등록 2003.12.31 10:26수정 2004.01.02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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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이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저 앞에서 뭔가가 달려오고 있었다. 큰 사슴이었다.
"잡아라!"

에인이 저지를 하기도 전에 젊은 군사가 먼저 달려 나가며 활을 쏘았다. 명중이었다. 사슴은 이백 보쯤 앞에서 그대로 고꾸라졌고 젊은 군사는 짐승을 향해 신나게 말을 몰아갔다. 은 장수가 에인 옆으로 다가들며 말했다.
"오늘 밤은 저놈을 구워 먹으며 야영을 해도 되겠습니다."


에인은 얼른 사방을 돌아보았다. 능선 저 넘어 산자락이 가뭇해 보였다. 어느새 날이 저물고 있었다. 날이 저무는데도 큰 사슴이 여기까지 뛰어나올 리가 없었다. 게다가 사람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호랑이나 큰 짐승에게 쫒기고 있다는 증거다. 잘못하면 맹수의 무리를 만날 지도 몰랐다. 에인이 급하게 안내선인을 불렀다.

"마을은 아직도 멀었소?"
"50여 리쯤 남았을 것입니다."
"저 산을 지나가야 하오?"
"그렇습니다만, 그 앞에 큰 길이 있어서…."

그때였다. 안내선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이상해서 걸음을 멈추는데 뒤이어 말을 탄 일단의 사나이들이 능선을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사슴에 정신이 팔려 있던 젊은 군사도 그제사 황급히 말에 올랐고 에인 일행도 서둘러 그쪽으로 다가갔다. 말을 탄 사나이들이 가까이 오며 큰 소리로 외쳤다.
"모두 섰거라!"

그들은 오십 보 간격 앞에서 모두 멈추어 섰다. 선두에 선 사나이는 활도 아닌 넙적한 칼을 들었고 행태나 차림새들도 사뭇 거칠어보였다.
먼저 은 장수가 앞으로 나서며 재빨리 상대들의 인원을 파악해 보았다. 고작 스무 명이었다. 장수는 아주 같잖다는 듯 눈까지 내려뜨고 그들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누구요?"
"저 사슴의 임자다!"
"달리는 산짐승도 임자가 있나?"
"물론이다!"
"흰소리 그만하고 썩 길을 비켜라!"


은 장수가 으름장을 놓았다. 에인은 지금 자기 장수가 실수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겉보기에도 짐승의 가죽옷에 호피 모자까지 쓴 것이 수렵인들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시비를 걸 것이 아니라 사슴을 되돌려주거나 그 값을 판상함이 옳았다.

에인이 장수에게 자기 생각을 전하려고 할 때 제후가 다가와서 나직이 속삭였다.
"호족(虎族)입니다. 저들은 정착생활을 모릅니다. 그저 세상 사방으로 흩어져서 저렇게 노략질만 일삼고 있지요."
그 말을 듣고 에인이 앞으로 썩 나서며 패거리들에게 물었다.


"당신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이오?"
"남의 사슴을 가로챘으니 우리들은 당신들의 짐을 가로채겠다."
제후의 귀띔처럼 역시 도적 패거리들이었다.
"우리들의 어떤 짐을 말이오?"
에인이 되물어보았다.

"말은 필요 없다. 마차만 넘겨라. 그러면 용서해주겠다."
"보아하니 당신들은 고작 스무 명인데 그 인원으로 우리의 마차를 뺏을 수 있을 것 같소?"
"우리는 불패를 모르는 호족이다. 반항한다면 너부터 처치하겠다."

도적의 두목이 호기롭게 칼을 쳐들었다. 같은 순간에 에인도 지휘봉을 잡았다. 그렇게 지휘봉을 잡는가 했더니 어느새 그의 말이 앞으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에인의 말이 두목 앞으로 아슬아슬하게 비켜가는가 했더니 벌써 상대의 칼이 땅바닥으로 떨어지며 둔탁한 쇳소리를 냈다.
"공중을 봐라!"
누군가가 외쳤다. 손 하나가 공중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손목이 잘려나간 두목의 손이었다. 두목이 칼을 놓친 사이 손목도 함께 떨어져나간 것이었다. 육신에서 잘려나간 손은 공중에서 몇 바퀴 빙빙 돌다가 마침내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때쯤 에인은 이미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사람들도 비로소 시선을 거두며 휴, 하고 더운 숨을 내쉬었다.

"내가 오른손을 자른 것은 다시는 그 손으로 노략질을 일삼지 말라는 뜻이다."
에인은 칼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이상하게도 그의 칼날에는 핏방울 한점 묻어 있지 않았다. 에인이 다시 적들을 행해 명령했다.
"어서 떠나라!"

적들이 슬금슬금 말머리를 돌렸다. 에인이 그들 꽁무니를 향해 다시 말했다.
"그 사슴은 너희들 것이다. 함께 수습해가라!"
한 사람이 말에서 내려 사슴을 실었다. 반드시 그 사슴을 가져가고 싶어서라기보다 어쩐지 그 젊은이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던 때문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결코 우렁차지 않았지만 거역할 수 없는 어떤 기운이 서려 있었다.

적들이 급하게 떠난 자리에는 두목의 칼과 손만이 남아 있었다. 손과 칼의 간격이 아주 가까웠음에도 그것들은 서로 반대방향으로 향해 있었다. 은 장수는 그것도 신기하다고 칼을 빼서 그 손 도막을 찍어 올리려고 했다. 그때 에인이 만류했다.

"내버려두시오."
"하긴 그렇군요. 도적의 손목을 첫 전리품으로 삼을 순 없지요."
은 장수가 칼을 거두며 말했다.
"내말은 그들이 와서 다시 보아야 하며, 그래야 이 일에 대한 일을 오래오래 잊지 않는다는 뜻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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