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죽으면 관에 '친일사전' 넣어주오" (2)

[의를 좇는 사람 (4)]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등록 2004.01.28 01:37수정 2004.01.28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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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없었던 시대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오마이뉴스 이종호
조선일보사 옆 오양수산 건물 302호실은 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 사무실로 조 이사장님은 이 기념사업회 이사장도 겸하셨다. 이사장실에서 이항증 선생과 필자, 셋이 대담을 나눴다.

조 이사장님은 “역대 친일 정권들은 민족반역자를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독립운동가를 처벌했어요”하고 친일파 이야기로 말을 꺼냈다. 동석한 이항증 선생은 “조 이사장은 역대 정권들이 3·1절이나 8·15 광복절에 초청장을 보내왔지만 한번도 식장에 가지 않았다”고 했다.

“생각해 보세요. 그 식장에 단상에서 훈장을 주는 사람과 단하에 초라하게 앉아 있는 독립 유공자가 만주 땅에서 서로 총을 겨누던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 아니었는지.”

이야기를 다시 1945년 7월 24일로 되돌렸다.

- 일제가 마지막 발악하던 그 무렵, 경비도 무척 삼엄했을 텐데 어떻게 폭파에 성공하셨습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하늘이 도왔다고 생각해요. 우리 어린 세 사람의 충정을 그야말로 하늘이 도운 거지요.

그 날 단상에는 당대의 친일파 거물들이 결성한 대의당(大義黨) 당수 박춘금을 비롯한 괴뢰 중국 왕정위 정권 대표, 괴뢰 만주국 푸이 정권 대표 그리고 총독부의 고위 관리들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경비가 무척 삼엄했어요.


빼곡히 들어찬 청중 사이를 우리 세 동지는 아무 두려움도 없이 폭탄을 들고 왔다 갔다 했고 거기서 폭탄을 장치해서 터트린 것은 지금 아무리 생각해도 기적이었어요. 안팎의 경비가 삼엄한 거기서 그 거사가 성공한 것은 하늘의 도움이었지요.”

현상금 붙은 사나이


- 허허실실 전법이었나 봅니다. 그 전에 시험 삼아 폭탄을 만들어보신 전력은 있었습니까?
“아니에요. 처음이었습니다. 사실 우리 세 사람 모두 폭탄 전문가가 아니었어요. 허울 좋은 부민관에서 우리 동족을 괴롭히는 못된 짓을 하는 대의당 그놈들의 꿍꿍이속을 분쇄하고자 수색 군수공장에서 다이너마이트를 구해 폭탄을 만들었어요. 류만수 동지가 손재주가 아주 좋았어요.

가장 염려가 되었던 것은 폭발시키는 도화선이었는데 그때 우리가 만든 도화선은 명주실을 썼어요. 그게 성공한 것은 하늘이 도운 거지요. 원래는 폭탄을 세 개 만들려고 했으나 시간 부족으로 두 개만 만들었어요.

우리 세 사람이 폭탄 두 개를 들고서 어디다 설치할까 40여 분을 헤매면서 장소를 물색하다가 무대 어귀에다 장치한 후 명주실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밖으로 뛰쳐나갔지요. 곧 폭탄소리가 나데요. 무조건 튀었지요.”

박춘금, 그는 누구인가?

1891년 경남 밀양 태생. 청년시절 일본인 술집에서 심부름을 하며 일본말을 배운 것을 밑천으로 일본에 건너가 입지전적으로 성공한 인물이다. 일본 본토에서 활동한 대표적 친일파로 조선인으로서 일제 심장부 도쿄에서 두 번이나 대의사(代議士·국회의원)에 당선된 사람이다.

1945년 6월 25일 그는 경성 부민관에서 당대 친일파 거두를 불러 모아 대의당(大義黨)을 결성하여 당수에 취임했다. 해방 후 친일파들의 죄상을 폭로한 <민족정기의 심판>에 따르면, 대의당은 항일·반전 조선 민중 30만 명을 학살하려 했던 일제 주구의 살인단체로 드러났다.(정운현 지음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에서 발췌)
- 일제 군경들이 행사장 언저리에 좍 깔렸을 텐데 어떻게 무사했습니까?
"그 놈들도 어리석은 구석이 있더라고요. 감히 그곳에서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를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거지요. 폭탄소리가 나자 순식간에 비상경계가 내렸어요.

나는 그 폭탄소리에 청계천 쪽으로 냅다 튀었어요. 장사동 어디쯤에선가 일경에게 불심검문을 당했어요. 뭐라고 둘러댔더니 별 의심치 않고 풀어주더군요.

내 옷에서는 화약 냄새가 났을 텐데…. 그 놈이 그걸 눈치 채지 못하더군요. 정말 천우신조였어요. 그 길로 각자 고향으로 내려가서 일대를 전전하면서 숨어 지냈어요. 그때 우리 세 동지에게 붙어진 현상금이 5만원이었어요. 곧 일제가 패망하고 해방이 되어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지요. 이 모두가 하늘이 도왔지요."

독립운동가 후손은 고아원에 가고

독립운동을 한 집안은 3대가 가난하다고 하고, 친일을 한 집안은 자자손손이 부귀 영화를 누린다고 한다.

제1공화국 제2공화국 제3공화국의 각료 절반을 훨씬 웃도는 이가 친일인사요, 지금도 국회의원이나 고위공무원·재벌·교육계·법조계·문화계 등 각계각층 인사 가운데는 그 후손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동석한 이항증 선생의 선대는 안동 임청각 주인으로, 증조부 석주 이상룡 선생이 가족을 이끌고 만주에 가지 않고 집안 관리만 했어도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전답으로 호의호식했을 것이다.

그런데 석주 선생을 비롯한 아들 손자 3대가 독립운동을 한 바람에 집안은 풍비박산되어 그 증손자들은 해방 후 고아원에 가서 학교를 다녔다는, 해방을 의심케 하는 일도 벌어졌다.

- 그 날 함께 거사한 동지들의 근황을 말씀해 주십시오.
“류만수 동지는 한쪽 폐를 자르는 병고 끝에 작고하셨고, 강윤국 동지는 생존해 계시는데 고령 탓으로 인사불성이에요. 이따금 찾아 보지요."

두 분 모두 생활이 어려워 당신이 보훈 신청을 해 드렸으나 정작 당신은 신청치 않았다고 했다. 그러자 딸과 사위가 당신 몰래 신청을 해서 당신도 뒤늦게 보훈 혜택을 받고 있다고 했다.

옛 부민관(현 서울특별시의회)
옛 부민관(현 서울특별시의회)박도
- 부민관 폭파 의거의 의의에 대해 몇 말씀해 주십시오.
“단순히 극렬 민족 반역자 박춘금 일당의 대의당 결성이 눈에 거슬려 거사를 했어요. 해방된 후에 알고 봤더니, 그들은 그때 아주 끔찍한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고 해요.

그들은 이른바 일제 친위대로 항일·반전 조선 민중 삼십만 명이나 학살할 음모를 하고 있었다고 해요. 대의당이란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동족을 살인하려던 아주 무서운 집단이었어요. 우리의 거사 성공으로 간담이 서늘해진 그들 일당들이 추진 계획을 잠시 주춤하던 차에 해방을 맞은 거지요.

아무튼 그들의 민족반역 행위에 폭탄을 터트려 민족혼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은 그자에게나 일제에게나 경종을 울린 거지요. 대의당을 연구하는 사학자는 우리의 거사가 민족진영의 목숨을 살렸다고도 평가하더군요.”

민족혼을 심어준 외할아버지

항일사상을 가지게 된 배경을 여쭤보았다.

“외가에서 소학교를 다녔는데 외할아버지께서 늘 ‘왜놈’ ‘친일파’ ‘역적 놈의 씨알머리’와 같은 말씀을 하신 게 어린 나에게 흰 천에 먹물 배듯이 물들었나 봐요. 외할아버지는 함자가 ‘이(李)’자 ‘조(肇)’자 ‘영(榮)’자로서, 조선말에 승지를 지내신 분이셨어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준비를 하고 있는 친일파인명사전 발간 의의에 대해서 말씀해 달라고 했다.

“친일파를 청산해야 민족정기가 살아나고 민족정기가 살아나야 국론이 통합되고 민족의 화해도 이뤄집니다. 그리고 남북통일도 이루어지지요. 해방 후 가장 먼저 청산했어야 할 부일 민족반역자를 이승만의 방해로 반민특위가 무산돼서 그때 처벌받을 사람 중 지금 살아있는 사람은 없다고 봐요.

지금 세상에 부관참시는 할 수 없고 친일 반역의 기록이라도 남겨야 후손들이 다시는 민족 반역을 하지 않을 겁니다. 친일파인명사전 발간은 나라를 바로 잡는 첫 걸음이에요. 또 우리 세대의 마지막 책무이기도 하고요.”

조 이사장님의 단호한 어조에 실내가 숙연해졌다.

“독립운동가라도 한 목소리를 냈다면 오늘 이런 혼란은 가져오지 않았을 텐데….”
자탄 자괴하시는 모습이 역력하셨다.

역사가 살아야 민족이 산다

마무리 말씀을 부탁드렸다.

“역사가 살아야 민족이 삽니다. 내가 박 선생, 아니 박 동지에게 부탁드립니다. 우리 역사를 제발 아이들이 알기 쉽게 글로 써서 많이 읽을 수 있게 해 줘요. 지금 하시는 일 끝까지 일관되게 하세요.”
조 이사장님은 오히려 나에게 간곡히 당부하셨다.

대담을 마친 후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권중희 선생 대담 기사가 나간 후 ‘권중희 선생 미국 보내기 모금 운동’이 펼쳐졌다. 그 일을 핑계로 이 대담 기사를 쓰지 못하고 해를 넘겼다.

마침 국회에서 친일인명사전 발간 예산 5억원 삭감 소식이 전해지자 네티즌들이 들불처럼 들고 일어났다.

친일인명사전 모금운동이 한창 진행되던 2004년 1월 12일, 사죄 겸 새해 인사로 권중희 선생과 함께 민족문제연구소로 조문기 이사장님을 찾아뵈었다. 그 날이 모금 시작한 지 나흘째 되는 날 정오 무렵으로 막 1억원을 돌파할 즈음이었다.

“쏟아지는 독립자금에 살아있는 보람을 느꼈어요. 내 생전 꼭 친일인명사전을 만들어 지하에 계시는 선열들에게 선물로 가져가고 싶어요. 내 죽으면 친일인명사전을 관에다 넣어달라고 부탁해야겠어요.”

오랜만에 노 독립운동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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