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아름다운 뿌리를 가진 '송악'

내게로 다가온 꽃들(27)

등록 2004.03.05 11:27수정 2004.03.05 13:49
0
원고료로 응원
송악
송악김민수

송악의 푸른 잎을 보니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한 송이 꽃만 보고 다 보았다고 생각하면 더 이상 꽃이 들려주는 소리들을 들을 수 없습니다. 한 송이 꽃이 만들어지기까지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수고들을 간과하면 한 단면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김민수

보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때로는 꽃보다 아름다운 것들이 있습니다. 모든 식물들의 영양을 공급해 주는 뿌리는 식물들의 생명을 지탱해주는 근간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땅 속에서 묵묵히 꽃을 피워냅니다. 그리함으로 자신의 향기를 세상에 뿌리고, 자신의 속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어쩌면 꽃은 뿌리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소개해 드리는 송악은 특별히 뿌리와 덩굴줄기가 아름다운 식물입니다. 기댈 것만 있으면 나무고 바위고 돌담이고 가리지 않고 타고 올라갑니다. 그래서 상록의 송악이 휘감고 있는 나무들은 마치 거대한 상록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제주에는 돌담에도 송악이 많이 자라고 있는데 돌담 사이사이를 채운 덩굴 덕분에 돌담은 더욱더 견고하게 되고, 어떤 바람에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김민수

덩굴들마다 무슨 이야기라도 하려는 듯 기이한 모양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양새 때문에 어쩌면 꽃의 아름다움보다 덩굴의 기이함이 더 돋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송악은 오갈피나무과의 상록 덩굴식물입니다. 유심히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가지에는 공기뿌리가 있습니다. 맨 처음 뿌리는 땅에 있으나 나무든 바위든 돌담이든 타고 하늘로 향하다보니 땅 속의 뿌리만 가지고는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땅 속뿐만 아니라 덩굴마다에 공기뿌리를 내어놓고 공기 중에 있는 수분들을 섭취하며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김민수

일반적인 상식과는 조금 다른 삶의 모습을 봅니다.

공기뿌리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생존하기 위한 또 다른 생존 수단의 하나입니다. 무언가 부족한 것,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또 다른 무언가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삶이 있습니다.

남과 비교해서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인가 찾으려 하면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비교우위라는 허위개념을 버리고 자신을 바라보면 가진 것이 참으로 많음을 알게 됩니다. 열악한 환경이라고 좌절하지 않고 일반적인 상식-뿌리는 땅 속에 있다-을 뒤엎는 것, 이것이 혁명적인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김민수

감히 꽃보다 아름답다고 표현을 해봅니다.

송악이 들으면 별로 달가워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고생하고 힘써서 결정체를 만들었더니 그것을 예쁘다 아니하고 뿌리를 예쁘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걸 어쩝니까?

한번 송악의 공기뿌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니 자꾸만 꽃보다는 공기뿌리의 생김새에만 눈이 갑니다.

어떤 것에 관심을 갖는가에 따라서 보이는 것이 다르다는 평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김민수

때로는 이렇게 하늘을 향하고 있는 뿌리도 있습니다.

땅으로 향하지 않고 하늘로 향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삶이 참으로 치열하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돌담이나 나무, 바위 그 척박한 곳에 정을 주고 살아가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번 안아주면 평생을 껴안아 주는 변함없는 사랑을 보면서 우리네 삶도 대충 살아서는 안되겠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김민수

송악은 항상 봄처럼 푸른빛을 간직하고 있어서 상춘등(常春藤)이라고도 하고, 백각오공(百脚蜈蚣)이라고도 합니다.

전북 고창군 선운사(禪雲寺)로 들어가는 길 왼쪽에는 도솔천이 흐르고 있는데 이 도솔천 건너편 산의 절벽에는 멋진 모습으로 송악이 자라고 있다고 합니다. 아직 그 곳에 가본 적은 없지만 언젠가 동백이 필 무렵 그 곳에 가서 동백과 송악의 아름다움을 견주어 볼까 합니다.

송악은 10-11월에 꽃이 핍니다. 황록색 꽃 여러 송이가 모이고 모여 피는데 커다란 꽃송이를 이룬 듯 하고, 겨울준비를 하는 벌들에게는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다른 꽃들이 서서히 겨울잠을 자러 갈 때 피어나는 송악, 그래서 미처 겨울준비를 하지 못한 곤충들에게 양식을 제공하는 것을 보면 자연의 섭리라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김민수

그렇게 피었던 꽃이 추운 겨울을 보낼 때에는 이렇게 볼품없는 모습입니다. 쪼글쪼글해서 과연 열매가 제대로 익을 것인지 의아할 정도로 연약합니다. 그런 모습으로 온 겨울을 나면서 거의 침묵하다시피 새순도 내질 않습니다. 아마도 그 볼품없는 열매를 위해 온 정성을 기울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입춘이 지나고 봄이 오는가 싶으면 어느 날 갑자기 연한 새순들이 줄기마다에서 나오기 시작합니다. 송악의 덩굴줄기에서 새순이 하나 둘 돋아나면 봄이 옴을 알 수 있습니다.

김민수

그렇게 새순만 내는 것이 아니라 겨우내 볼품없던 열매가 어느 날 갑자기 통통하고 검게 익어갑니다. 열매의 모양새가 재미있습니다. 꽃 한 송이마다에서 열매들이 열었습니다. 이제 이 정도면 완연한 봄이 된 것입니다.

추운 겨울을 담고 있는 열매.

고난의 시간들을 견디느라 타들어 간 속내를 표현한 듯한 검은 열매, 그리고 분주하게 새순을 내는 줄기들을 보면 희망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느끼게 됩니다.

김민수

그래요.

가을 찬바람을 맞이하며 피우다 보니 꽃도 화사하지 않습니다. 곤충들이 많지 않은 계절이다 보니 강렬한 냄새가 아니면 안되겠기에 사람들이 맡기에는 좋지 않은 냄새일 수도 있으나 그로 인해 겨울을 준비하는 곤충들을 끌어 모읍니다. 그리고 추운 겨울을 담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런 모든 과정들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정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송악처럼 수고한 모든 것들을 골고루 보여주는 식물은 없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평등합니다. 뿌리도 보여주고, 줄기도, 잎도, 꽃 그리고 열매 모두를 보여주는 평등한 꽃 송악입니다. 더 나아가 꽃보다 아름다운 뿌리를 간직함으로 모든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온 몸으로 표현하는 꽃입니다.

덧붙이는 글 | <내게로 다가온 꽃들>은 총 100회를 목표로 시작했으며, 이 기사를 통해 나오는 원고료와 관련 수익금은 전액 불우어린이들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기사까지의 기금] 504,000원

덧붙이는 글 <내게로 다가온 꽃들>은 총 100회를 목표로 시작했으며, 이 기사를 통해 나오는 원고료와 관련 수익금은 전액 불우어린이들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기사까지의 기금] 504,000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2. 2 의사 아빠가 죽은 딸의 심장에 집착하는 진짜 이유 의사 아빠가 죽은 딸의 심장에 집착하는 진짜 이유
  3. 3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 경희대 시국선언문 화제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 경희대 시국선언문 화제
  4. 4 남편 술주정도 견뎠는데, 집 물려줄 거라 믿었던 시댁의 배신 남편 술주정도 견뎠는데, 집 물려줄 거라 믿었던 시댁의 배신
  5. 5 미국에 투자한 한국기업들 큰일 났다... 윤 정부, 또 망칠 건가 미국에 투자한 한국기업들 큰일 났다... 윤 정부, 또 망칠 건가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