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것
이응길과 그 일당은 참수되었지만 그렇다고 충주 조창에서 빼돌려진 세곡 오천석에 대한 포도청의 감찰이 마무리 된 것은 아니었다. 용인의 밀주창고에서 발견된 장부에는 천 여 석만이 적혀 있었으니 나머지는 어디론가 빼돌려졌다는 결론이 나오는 셈이었기에 그러했다.
"심증으로는 그만한 물량을 감당하려면 한양의 싸전(육의전의 쌀가게)에 유입되었을 것 같네. 사안이 중대하며 조정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이니 주의를 기해주게나."
포장 박춘호의 당부에는 어쩐지 힘이 없어 보였다. 박춘호가 다른 곳으로 간 후 김언로는 백위길에게 귀엣말로 속삭였다.
"포장이 어제 기방의 오월이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난리가 났다고 하네."
기방의 오월이라면 잔심부름을 도맡아하던 퇴기임을 백위길은 기억하고 있었다. 오월이를 붙잡고 사정하듯 말하는 박춘길의 모습과 평소의 당당한 모습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았다.
"하여간 자네하고 난 골치 아픈 일만 자꾸 떠맡게 되는군."
김언로와 백위길은 싸전을 돌아다니며 장부를 살펴보고서는 이것저것을 따져 물었는데, 막연한 심증으로 돌아다니는 만큼 아무래도 조사는 건성으로 이루어졌다.
"이 백정놈이 내가 어디 됫박을 속였다고 난리를 치는 게냐!"
김언로가 다른 볼일이나 보겠다며 새어 나간 후 혼자 싸전을 둘러보던 백위길은 소란이 일어나 사람들이 몰려든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 보았다.
"내 한 두 번은 넘어가나 매번 이러니 따지는 게 아니오! 어찌하여 쇠고기 두 근에 쌀이 이 정도요?"
"어허… 이 생사람 잡을 놈이네! 야 이놈아 여기 다른 싸전 사람들에게 물어보거라."
다른 싸전 상인들도 됫박이 맞다 역성을 드니 '백정'이라 불린 이는 얼굴이 붉어지며 손에 든 고깃덩이를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에라 이 도적놈들아! 아예 작당을 했구나!"
백위길이 자세히 보니 백정이라 불린 이는 분명 낯이 익은 듯 했다. 백위길이 좀 더 자세히 보니 그는 분명 예전에 반촌에 갔을 때 다신 여기 오지 말라며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누었던 우락부락한 반촌사내였다.
"이보게 무슨 일인가?"
백정 역시 백위길을 알아보고선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백위길은 그런 반촌사내를 지나쳐 보며 싸전 상인에게 됫박을 보자고 했다.
"자, 보시오! 멀쩡한 됫박 아니오!"
백위길이 잘 살펴보니 별달리 이상한 점을 볼 수 없었다. 백위길은 됫박을 흔들며 반촌사내를 꾸짖었다.
"어떤 연유로 셈이 틀렸다고 했는가?"
반촌사내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안다는 듯 집어던진 고기를 집어 올리며 조용히 자리를 뜨려 했다. 하지만 기세 등등해진 싸전 상인들이 이를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이놈아, 포교 앞에서 함부로 남을 무고했는데 어딜 가려는 게냐?"
싸전상인들과 반촌사내가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백위길의 눈에 또 다른 됫박이 띄었다. 백위길이 집어서 보니 보통 됫박과 크기는 같은데 바닥이 훨씬 얕은 것이었다.
"게 멈추거라. 이리 와서 이것을 보라."
백위길은 두 개의 됫박을 뒤집어 들고선 반촌사내에게 보였다. 이를 본 싸전 상인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아까 이 상인이 어느 됫박으로 셈을 했느냐?"
반촌사내는 백위길을 한번 쳐다보더니 서슴없이 색깔이 짙은 됫박을 골랐다. 백위길이 도로 뒤집으니 바닥이 얕은 됫박이었다.
"내 이놈! 됫박을 속이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알렸다!"
다른 싸전 상인들은 슬금슬금 물러서기 시작했고 됫박을 속인 싸전 상인은 우는 소리를 하며 백위길에게 매달렸다.
"아이고 소인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테니 그저 가련한 백성 하나 살려주는 셈치고 약소하나마 여기 쌀 말이라도 가져다 드시옵소서."
"네 나를 어찌 보고 그런 망발을 하느냐! 하던 셈이나 제대로 한 후 포도청에 가 자초지종을 아뢰렸다!"
백위길은 더욱 화가 나 싸전 상인의 손목을 틀어 잡고 기찰 중인 포졸들을 불러 포도청으로 압송하라 일렀다. 이를 지켜보던 반촌사람은 백위길에게 다가가 넓죽 엎드려 절한 후 감사함을 표했다.
"이런 분이신 줄 모르고 예전에는 결례가 많았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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