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88

검은머리 사람들(하)

등록 2004.06.25 09:41수정 2004.06.25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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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이 안내된 방은 천국의 거실 같았다. 창에는 커튼이 쳐졌고 커튼밖엔 키큰 야자나무가 빼곡히 들어찼으며, 무엇보다도 그 옆에 침대가 있었다. 여태 한데 잠만 자오던 그에겐 그 나무 침대가 어머니의 요람보다도 더 반가웠다.

그는 선걸음에 침대로 갔고 거기에 쓰러져 누웠다. 곧 잠이 쏟아져왔다. 한 이틀쯤 계속해서 자고나면 노독도 풀리고 새로운 기운도 생겨날 것이었다.


그가 막 깊은 잠의 지대로 빠져들 때였다. 누군가가 와서 그를 흔들어 깨웠다. 눈을 떠보니 새까만 남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여대며 그를 깨우는 것이었다. 이곳 시종인가 보았다. 에인은 지금 자기는 일어날 수 없다는 시늉으로 손과 머리를 흔들어 보인 후 다시 뒤돌아 누웠다.

한데도 시종은 물러가지 않고 계속해서 그를 흔들어대는 것이었다. 그는 마지못해 일어나 앉았다. 그러자 시종이 이번에는 자기를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만약 따라가지 않으면 끝까지 치근거릴 게 분명했다. 에인이 성이나 볼을 불룩거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 시중이 안내한 곳은 목욕실이었다. 시종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에게 옷을 벗으라 일렀다. 그는 그만 돌아섰다. 목욕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자 시종이 쪼르르 달려나와 그의 옷자락을 잡아채고 다시 욕실로 이끌고 들어갔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옷을 벗었다. 목욕통에도 이미 물이 받아져 있었다. 그가 시키는 대로 목욕통에 들어가자 시종은 야자유를 풀어 그의 몸을 씻겨주었다. 시종의 손길이 부드러워서인지 몸과 마음이 금방 편안해졌다.

목욕이 끝나자 시종은 마른 천으로 그의 몸을 닦아준 후 선반에서 흰옷을 들고 와 그에게 입혀주었다. 한쪽 어깨를 걸고 또 한쪽은 겨드랑이에서 묶는, 소매 없는 토가였다. 옷의 형태야 어쨌든 천의 질감이 부드러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옷을 입고나자 시중이 다시 자기를 따라오라는 시늉을 하며 먼저 밖으로 나갔다. 시종이 향하는 곳은 자기 방과 반대편인 테라스 쪽이었다.

에인의 방은 별채 맨 가장자리였고 그 별채 앞면은 전체가 길고 넓은 테라스로 이어졌다. 테라스의 차양은 야자나무 잎으로 덮였고 테라스 안쪽은 연회장과 방들이 붙어 있었다. 연회장은 테라스까지 툭 트였는데, 사람이 많을 때는 테라스까지 사용할 수 있어 편리한 구조였다.


그 별채는 지붕도 특이했다. 중앙에는 상아로 만든 높고 뾰족한 탑이, 양 귀퉁이에는 외가닥 상아가 길게 올려져 있었다. 하긴 타국에서 초청받거나 놀이삼아 찾아오는 귀족이 많으니 그들이 배를 타고 올 경우 그 지붕 탑만 보고 따라오라고 그렇게 지었는지도 몰랐다. 그 별채는 애초부터 왕손들의 사교를 위해 지어진 건물이었던 때문이다.

에인은 걸음을 멈추고 테라스 앞쪽을 바라보았다. 그 앞은 또 잘 가꾸어진 정원이었다. 정원엔 나무들이 줄지어 섰고 그 가지엔 노랑나비들이 촘촘히 앉아 있었다. 저렇게 많은 나비가?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건 나비가 아닌 흡사 나비처럼 생긴 꽃이었다. 더욱이 그 나무 또한 눈에 익었다. 니푸르의 시냇가에 방풍림처럼 서 있던 타마린드였다. 그 키큰 타마린드를 여기서는 꽃만 보기위해 우듬지를 잘라내고 정원수로 가꾸는 모양이었다.

문득 니푸르의 그 시냇가가 생각났다. 거기서 일어났던 야릇한 감정들, 여인을 가지고 싶던 강열한 욕구까지 떠올랐다. 자기를 그런 욕구로 끌어들인 상대가 분명히 있었건만 언제나 먼저 떠오른 것은 그 여성이 아닌 그때의 감정과 욕정이었다. 마치 뜨거운 불기둥이 발끝에서 머리까지 곤두서는 듯하던 느낌…. 자신도 예측하지 못했던 그 뜨거운 불덩이….

시종이 다가와서 다시금 그를 잡아끌었다. 빨리 가자는 것이었다.
그는 걷기 시작하면서 이번엔 테라스 안쪽을 돌아보았다. 한 연회장에서 검은 남자들이 미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왕족들이나 초청받은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나는 여기에 왜 왔을까? 무슨 신분으로 온 것일까? 죄인으로 왔다면, 또 그렇게 받아들여졌다면 이런 환대는 하지 않았을 텐데….'

그는 다시 엔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별채에 데려다주면서 엔키는 말했다.
'저녁에는 연회석이 준비될 테니 그때까지 푹 쉬십시오.'

그렇다면 지금 자기가 따라가는 곳은 그 연회장일 것이다. 무엇을 위한 연회인가? 단순한 환영회, 혹은 이곳 사람들과의 만남? 한데 엔키라는 그 사나이가 어떤 사람일까? 무슨 마음으로 자기를 환대하는 것일까. 보다도 어떤 경로로 나를 받아들였으며, 또한 귀한 손님대접까지 하려는 것일까?

마침내 에인은 테라스 끝 지점에 도착했다. 거기서 몇 개의 계단을 내려가자 사면이 탁 트인 정자 같은 홀이 있었고 그 홀 앞엔 또 정원이었으며 그 정원 저 멀리로 바다가 보였다.

에인이 곧장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그를 기다리던 엔키가 재빨리 다가오며 인사를 했다.
"잘 쉬셨습니까?"
"예, 덕분에…."
"자, 여길 둘러보십시오. 시원하지 않습니까?"

엔키가 바다가 보이는 홀 난간으로 그를 이끌었다. 거기서도 바다는 아주 잘 보였고, 게다가 낙조까지 물들어 마치 별세계를 구경하는 것 같았다.
"참 좋군요."
에인이 말하자 엔키가 자랑을 했다.

"여기가 제 전용 연회장입니다. 제가 이 자리를 선택했지요. 달 밝은 밤 여기에 앉아 비파를 뜯으면 그 기분이 곧 신선이랍니다."
그리고 엔키는 또 서둘러 오른편에 놓인 긴 상으로 그를 안내했다.
"시장하시지요? 이제 자리에 앉으시지요."

에인이 상 앞에 앉기도 전에 엔키는 또 밖을 향해 '탁!탁!'손뼉을 쳤다. 에인은 자리에 앉다 말고 엉거주춤 엉덩이를 들고 기다렸다. 왠지 혼자 먼저 앉는 것이 예의가 아닐 것 같아서였다.

"곧 음식이 대령할 것입니다."
엔키가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앉을 때도 엔키는 긴 옷자락을 살짝 들어올리는 등 사뭇 태를 부렸는데, 서두르는 모습과는 또 사뭇 달랐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도 전에 에인은 먼저 그의 별스러움에 시험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마침내 음식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길고 흰 치마만 걸친 검은 사람들이 해물과 육 고기 그릇을 놓고 조용히 나가자 뒤이어 두 사람이 큰 항아리를 들고 들어와 엔키 옆에 놓았다.

엔키는 운두가 높은 토기 잔을 들어 그 항아리에서 술을 퍼 담은 뒤 에인 앞에 내밀었다. 검은 색깔이 감도는 맥주였다.
"자, 이 맥주부터 마시십시오. 아주 시원할 것입니다."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에인이 그 잔을 사양했다.
"이건 약한 술입니다. 식사 전에 조금 마셔두시면 소화에도 도움이 될 테니 입이라도 축이시지요."

에인이 더 거절할 수 없어 그 술잔을 받아 마셔보았다. 쓴맛이 혀끝을 돌아 목으로 넘어갔다. 그러자 불현듯 식욕이 느껴졌다. 검은 맥주란 것이 입맛을 잃었을 때 의원들이 자주 쓰는 그런 쓴 약초와도 효과가 비슷한 모양이었다.

식사가 끝나갈 때 하인들이 또 다른 술병을 들고 들어왔다. 그것은 맥주보다 독하고 맑은 사탕야자 술이었다.
"이 술은 흥을 돋아주지요."

그리고 엔키는 밖을 향해 또다시 손뼉을 딱딱 쳤다. 그러자 이번엔 붉은 옷을 입은 한 미소년이 비파를 들고 들어왔다. 얼굴이 흰 것이 환족 같아보였다.

소년은 맞은 편 야자나무 의자에 사뿐히 앉아서 비파를 뜯기 시작했다. 아랫통이 넓은 25현 비파였고, 그것은 소호 국 악사들이 쓰는 것과 똑같았다.
환족에다 소호국 비파라…. 에인이 그 소년을 바라보고 있자 엔키가 또 얼른 그의 관심을 자기 쪽으로 이끌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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