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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두에서 니푸르까지는 약 4백리 길이었다. 제후는 뭐가 그렇게 다급한지 몹시 서둘렀다.
"마차는 알아서 따라올 테니 우리 먼저 달려가지요."
그들은 쉬지도 않고 달렸다. 유프라테스 강을 건널 때 말들에게 잠깐 물을 먹인 것 이외는 속력도 늦추지 않았다. 에인이 역시 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서 가서 참모들을 만나야 했다.
니푸르에 도착한 것은 한밤중이었다. 마을에 도착해서도 제후는 두두의 외삼촌 의 집이 아닌 곧장 장로회관으로 앞서갔다. 밤이 깊었는데도 회관 앞에는 횃불이 사방에 걸려 있었고 문까지 활짝 열려 있었다. 제후가 먼저 말에서 내려 회관으로 달려가며 큰 소리로 알렸다.
"장군님이 오시오!"
회관 안에서 에인의 병사들이 우루루 몰려나왔다. 그들은 모두 갑옷에 칼까지 차고 있었다. 이렇게 무장을 했다면 니푸르를 장악했단 말인가? 에인이 말에서 내리며 은 장수에게 물어보았다.
"어떻게 된 일이오?"
"회관을 장악했습니다. 장군님을 모셔오기 전에는 한발도 물러나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요?"
"자 우선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에인이 회관 안으로 들어갔다. 기분이 묘했다. 자신의 처지가 전번과는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것도 얼른 실감할 수가 없었다. 그가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자 군사들이 의자를 내밀었다.
"앉으십시오."
에인이 의자에 앉자 책임선인이 눈물을 번들거리며 물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장군님? 답답해서 견딜 수 없으니 어서 자초지종을 말씀 좀 해주십시오."
에인은 그들의 경로가 더 궁금해서 은 장수를 돌아보며 물어보았다.
"보다도 먼저 그대들 이야기부터 해보시구려. 왜 그대들이 이곳을 장악했는지 말이오."
이야기를 시작한 사람은 책임선인이었다.
"두두가 돌아와서 장군께서는 도시들을 돌아보시느라 며칠 더 걸리신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열흘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시기에 제후에게 말했지요. 당장 함께 장군님을 찾아 나서자구요. 그랬더니 그럼 자기 혼자서 우선 찾아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믿고 보냈더니 이번엔 제후마저 한달 넘게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요?"
"그래, 두두를 불러 닦달질을 했지요. 그 아이가 자꾸만 횡설수설을 하기에 그럼 마지막으로 장군님과 헤어진 곳이 어디냐, 거길 안내하라고 했더니 두두가 말하더군요. 거긴 니푸르라고. 분명히 니푸르에 계셨는데 왜 여태 돌아오시지 않는지 자기도 모르겠다고…. 그래서 우린 기병 반을 이끌고 당장 달려온 것입니다."
일이 그렇게 되어 그가 멜루하에서 풀려난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제후나 촌장이 먼저 나서서가 아니라 자기 부하들이 니푸를 장악해서야 그를 찾아준 것이었다. 그래, 나에 대한 궁금증은 이 정도면 되었고 그렇다면…. 에인이 다시 책임선인에게 물어보았다.
"그럼 천둥이는 거기 가지 않았소?"
"천둥이가 오다니요? 그럼 장군께서는 여태 천둥이와도 함께 계시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책임선인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천둥이는 딜문에도 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살아 있다면 분명히 갔을 녀석이다. 그렇다면 사막에서 길을 잃었단 말인가? 그때 은장수가 뒤를 이었다.
"어쨌든 이 마을에 도착해보니 낌새가 이상하더군요. 그래서 먼저 촌장을 잡고 다그쳤지요. 촌장이 이실직고하기를, 장군께서 여기 장로들과 문제가 생겨 잠깐 외지로 나가셨다더군요. 해서 우린 그날 당장 장로회관을 점거하고 이렇게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그럼, 여기서 기다린 지는 얼마나 되었소?"
"열흘째입니다."
그때 두두의 외삼촌이 에인의 지휘검을 들고 회관 안으로 들어왔다. 자기는 에인의 유배에 무관하다는 것을 어서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장군님, 여기 장군님이 놓고 가신 검입니다."
"고맙소."
에인은 얼른 지휘검을 받아 쥐었다. 그는 곧 소뿔 손잡이와 용과 해의 음각이 새겨진 칼집을 쓰다듬으며 '다시는 부주의가 없도록 하겠습니다'하고 속으로 아뢰었다. 그러자 지휘검이 곧 응답을 했다. 진동이었다. 그 진동이 그의 온몸 구석구석을 돌며 그간 구겨지거나 졸아든 마음을 낱낱이 펴주는 듯했다. 에인의 마음이 한없이 넓어지면서 그 자리에 편안함이 고여 들었다. 그때 은장수가 물어왔다.
"우리는 장로회장이라는 사람 집도 점거하고 있습니다. 그가 장군님께 턱없는 고통을 주었다면 당장 잡아올 테니 문초를 하시겠습니까?"
"아니오, 그럴 필요 없소."
"그럼 불질러버리고 올까요?"
"잠깐! 모두들 그대로 있으시오."
그때 에인의 몸에서 어떤 감응이 오고 있었다. 그는 군사들에게 동작을 중지시키고 자신도 눈을 감았다. 따끈따끈한 그 무엇이 온몸을 어루만지듯 감돌았고 그와 동시에 그의 얼굴이 점차 붉어지기 시작했다. 붉은 혈색이 양 볼에 몰리는가 했더니 그것이 신비한 미소를 피워내면서 차츰차츰 입가로 몰려갔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지켜보았고 에인은 그 시선들 속에서 자신의 지휘 검과 뜨겁게 접신을 하고 있었다.
마침내 에인이 눈을 떴다. 혈색도 미소도 사라졌지만 그 얼굴은 투명한 막이 씌워진 듯 깨끗해져 있었다. 그간의 고통을, 남기면 강하게 부식작용밖에 할줄 모르는 인간의 고뇌를 그의 신이 깡그리 제거하고, 아지랑이 보호막을 그 위에 씌워준 것이었다.
에인이 지휘 검을 꼭 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때 촌장은 오금이 저려 오줌까지 지릴 지경이었다. 당장에라도 에인이 그 칼을 빼들고 '네가 원흉이라는 것을 안다!'하고 신검을 날릴 것 같았다. 하지만 에인은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자기 군사들을 향해 명령만 내릴 뿐이었다.
"자, 이제들 돌아갑시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군사들도 벌떡벌떡 몸을 일으켰다. 에인이 앞장을 섰고 군사들이 호위하듯 뒤를 따랐다. 제후까지도 일행들을 따라 나갔건만 촌장은 인사 한마디 못한 채 홀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말발굽소리가 마을을 진동하며 사라져갈 때 그는 털퍼덕 바닥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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