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 초기의 압록강, 중간 교량을 회전시켜 선박을 통과시켰다서문당
강가에서 가늠해 보니까 서울의 한강보다는 더 넓고 강심이 깊어보였다. 압록강을 가로지르는 철교는 지난날 우리 동포들이 중국으로 가는 길목으로 신의주와 중국 단동을 잇고 있다.
이 철교는 1908년 8월에 착공하여 1911년 10월에 준공했다. 초기에는 교량 중간에 개폐식 장치를 하여 선박을 통과시켰다고 한다. 이 철교는 1950년 6·25 전쟁 때 미군들이 폭파했던 것을 그 왼편에 다시 세웠다.
지난날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넜던 우리 겨레의 중국 대륙 이주사(移住史)는 온통 핏빛으로 얼룩졌다. 초기에는 조선조 후기로 주로 흉작에 따른 가난과 탐관오리들의 폭정 때문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부터 1920년대까지는 주로 항일운동을 위한 정치적 망명이었고, 그 이후는 일제의 강제 이주 정책에 따른 이주였다.
1910년 국치를 전후로 신민회를 중심으로 한 민족지사들이 국외 독립기지를 만들기 위하여 주로 압록강을 건너 서북간도와 남북 만주, 러시아 연해주 지역으로 갔다.
이상설, 이동녕, 이회영, 이상룡, 김동삼 등 민족지사들이 압록강을 건너 단동, 관전, 환인현의 횡도천을 거쳐 통화, 유하현 삼원포로 이동했다고 한다. 이분들 중에는 40, 50여 명의 가족단을 이끌고 네 마리 혹은 여덟 마리 한족 마차를 빌려 타고 열흘에서 보름 걸려 목적지에 이르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