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라는 놔두고 혼자 내 뺄 생각을 해요?"

겨울 김장용, 배추와 무씨를 심었습니다

등록 2004.08.25 05:52수정 2004.08.25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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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20년을 살았으니 이제 제법 농사에 이골이 났을 법도 한데 아직도 얼치기 농사꾼에 머물러 있습니다. 농사는 절기와 깊은 연관이 있어 때를 놓치면 안 되지요. 그러나 우리 내외는 번번이 때를 놓치기 일쑤입니다. 누구를 탓할 것도 없습니다.


지난 주 텃밭에서 풀과의 전쟁을 한바탕 치르고 이제 경운기로 밭을 갈고 골을 만든 다음 겨울 김장용 배추, 무씨를 심기로 했는데 이틀 동안 비가 쏟아져서 온 밭이 물구덩이가 되었습니다. 밭이 질면 흙이 떡덩이처럼 쟁기에 달라붙어 밭을 갈 수가 없습니다. 이미 다른 집은 배추, 무씨를 심은 지가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밭이 너무 질어 쟁기질을 할 수 없고, 관리기로 밭골만 내기로 했습니다.

지난주 풀과의 전쟁을 치르며.
지난주 풀과의 전쟁을 치르며.박철
아침부터 아내는 왔다갔다 분주합니다. 우리 내외가 아침부터 밭에서 절절 매는 것을 보고 우리 교회 교인 두 분이 도와주어 수월하게 밭이랑을 만들고 비닐 씌우기 작업을 마쳤습니다.

아내가 밭 가장자리에 물고랑을 치지 않아서 물이 잘 빠지지 않아 밭이 더 질다고 잔소리를 늘어놓아 하는 수 없이 삽과 괭이로 고랑을 쳤습니다. 고랑을 치는 정도가 아니라 다시 만드는 수준이었습니다. 평소 삽질을 안 하다가 하려니 힘이 들었습니다.

올해는 배추씨를 작년보다 더 많이 심기로 했습니다. 욕심 때문이 아닙니다. 겨울 김장을 해서 나누다 보니 300포기를 해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평소 우리 가족에게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김장을 담가 한 양동이씩 택배로 부칩니다. 우리가 담근 김치를 드시고 맛있게 잘 먹었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함께 나누는 기쁨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지요.

도랑을 다 치고 났더니 온 몸이 물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처럼 땀에 흠뻑 젖었습니다. 이제 비닐에 구멍을 뚫어주는 일을 할 차례입니다. 약 30센티미터 간격으로 비닐에 구멍을 뚫어주고 거기에 씨를 심고 채반에 걸러 낸 고운 흙을 살짝 덮어주면 됩니다.


나는 비닐 구멍을 뚫어주고 아내는 씨를 심습니다. 나는 낑낑거리며 하는데 아내는 무엇이 즐거운지 콧노래를 부르며 합니다. 키가 180센티미터가 되는 사람이 쪼그려 앉아서 하는 일을 매우 힘들지요. 아침밥도 안 먹고 서너 시간 일을 하다보니 배에서 연신 ‘쪼르륵’소리가 나면서 허기가 져서 도저히 일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어머니 집에 살짝 들어가 시계를 보니 오전 11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아직 일은 절반밖에 하지 못했는데 배는 고프고 슬슬 꾀가 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힘든 일은 다 끝냈으니 나머지 일은 아내 혼자서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요. 내가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아내가 쇠스랑으로 고랑을 고르고 있다.
아내가 쇠스랑으로 고랑을 고르고 있다.박철
"여보! 이제 나 집에 가도 되지? 힘든 일은 다 했잖아. 원래 밭일은 여자들이 다 하는 거야."
"그래, 마누라는 밭에 놔두고 혼자 내 뺄 생각을 해요?"

"다른 집도 밭일은 다 여자가 하드만. 다른 일은 다 하겠는데 쪼그려 앉아서 하는 일은 못 하겠어. 나 먼저 가서 밥 먹고 있을 테니 당신 혼자 천천히 하고 오시오. 내가 밥 먹고 또 올게."

"당신, 김장해서 다른 사람들한테 주면서 '이거 다 내가 농사지어 만든 거예요' 그렇게 말하려면 꾀부리지 말고 얼른 일부터 끝내요."

아내의 그 말에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채반에 거른 고운 흙으로 구멍을 덮어 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바람 한 점 없이 햇볕이 내리 쪼이고 잠자리들이 낮게 날아다니는 모습이 평화롭습니다. 배추, 무씨는 다 심었습니다. 이제 순무씨와 쪽파를 심는 일을 해야 하는데 배가 고파 더 이상 할 수 없었습니다.

우선 가까운 어머니 집에서 밥부터 먹기로 했습니다. 어머니는 오늘 외출을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다리를 쓰지 못해 늘 집에서만 지내시는데 우리 교회 장로님 한분이 바람 쐬어 드리러 차에 태워 모시고 나갔습니다. 주변에 이렇게 고마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배가 고프니 밥이 꿀맛이었습니다. 밥을 먹으면서 내가 배가 고파 죽을 뻔 했다고 하니 아내가 실실 웃습니다. 내가 왜 실없이 웃냐고 물었더니 아내가 말합니다.

"당신 대단한 농사꾼 같아요. 배가 고파 죽을 정도로 일을 했으니 얼마나 일을 많이 한 거야? 누가 보면 진짜 농사꾼인 줄 알겠어요."
"당신 나 없으면 아무것도 못해. 그래도 3분의 2는 내가 했어. 그러지 마."
"아이고, 다 했다고 그러시지."

점심밥을 잘 먹고 나머지 일은 좀 쉰 다음 하기로 했지요. 집에 돌아와 쉬고 있는데 역시 아내가 먼저 일어섭니다. 내가 곧 내려갈 테니 먼저 내려가라고 했더니 아내는 꾀부릴 생각 말고 얼른 내려오라고 합니다. 한참 시간을 보내고 내려갔더니 아내가 쇠스랑으로 밭을 고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골이 단단히 났습니다.

"아니 이제 오면 어떡해요? 금방 내려오겠다는 사람이…."

아내 혼자 순무와 쪽파를 심을 밭을 삽으로 이르고 쇠스랑으로 다 골라 놓았더군요.

"수고 많으셨네. 혼자 밭일을 한 것이 억울해서 이렇게 골이 나셨나?"

내가 괭이를 들고 일을 막 시작했는데 지나가던 현구 엄마가 우리 내외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한마디 합니다.

일을 다 마치자 날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일을 다 마치자 날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박철
"목사님은 왜 힘든 밭일을 사모님만 시키세요?"
"현구 엄마! 거 무슨 섭섭한 말씀을 그렇게 해요? 내가 오전에 배가 고파 죽을 지경까지 일을 했는데, 내가 일 할 때는 보지 못하셨나 보지요?"
"왜 이렇게 배추를 많이 심으셨어요? 김치공장 차리려고 그러시나?"
"그런 소리 마세요. 다 나누려고 심은 것이니 걱정 붙들어 매시오."

모든 일을 마쳤더니 저녁 7시가 넘었습니다. 아내가 흙손을 털면서 밝게 웃으며 말합니다.

"야! 이제 다 끝났네. 이제 아무 걱정 근심이 없네. 그렇게 많던 일을 다 끝냈으니 정말 좋네요."

집에 돌아오니 완전 '케이오' 직전입니다. 그래도 하루 종일 땀 흘려 일을 했으니 소중하고 고마운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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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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