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흥 장터, 허생원 조선달은 어디로 갔는지 썰렁하기 그지없다.박도
오늘이 안흥 장날이었다. 이발소에는 이미 손님이 머리를 깎고 있었다.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오는 길에 깎겠다고 하자 이발사는 일단 자기 가게에 들어온 손님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금세 된다고 했다. 그 말에 마음이 약해서 대기한 후 머리를 깎자 차 시간이 다 되어서 매우 급하게 이발소를 벗어났다.
버스 정류장에 이르러 친구에게 11시 45분 차를 타고 간다고 전화를 하려는데 손전화가 없다. 이발소에 빠트린 듯하여 그곳으로 가서 뒤져도 나오지 않았다. 다시 버스 정류장에 가자 막 버스가 들어오고 있었다.
버스 기사에게 공중전화에서 잠깐 한 통화하고 오겠다고 양해를 구한 후 전화 부스에 갔다. 동전을 넣고 다이얼을 돌렸으나 돈만 집어먹고 통화가 되지 않았다. 막 출발하려는 버스를 후딱 탔다. 버스비를 셈하고 자리에 앉으니 친구에게 주기로 한 책이 없었다.
갑자기 내 자신이 싫어졌다. 잠깐 사이 두 가지나 잃어버리다니. 건망증이 보통 심한 게 아니었다. 요즘 나는 정서 불안 상태다. 나이는 못 속인다고 하더니 내가 벌써 그런 나이가 되었는가? 나 자신에게 엄청 화가 났다. 다시 마음을 진정시킨 후 버스기사에게 시외버스터미널 도착 시간을 물은 후 손전화까지 빌려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12시 50분, 원주시외버스터미널 공중전화 부스 앞에서 친구와 나는 서로 얼싸안았다. 그는 오랜 투병 생활로 초췌했지만 예상보다 건강해 보였다. 그 많던 머리숱이 반 이상 빠져서 듬성듬성하다.
그와 나, 우리는 두보의 시 <강남봉이구년(江南逢李龜年)>에서 이구년과 두보가 꽃 지는 시절에 다시 만나듯 우리도 그렇게 만났다.
그는 지방대학의 학장을 역임하다가 지난해 병으로 퇴임한 교수인 바, 우리는 대학 시절 4년을 함께 강의실을 옮겨 가면서 배웠고 학훈단 동기이기 때문에 여름 방학 병영 훈련 때는 한 내무반을 썼던 전우였다. 거기다가 교직까지 같이 이수하였기에 그야말로 4년간 붙어다녔던 지기지우(知己之友)다.
한식집에 좌정한 후 서로 안부를 묻고 들었다. 그는 매우 열정적으로 살았다. 연애도 남다르게 열심히 해서 대학 재학 중 같은 학번인 교수 딸을 부인으로 맞아 졸업과 동시에 결혼한 비상한 재주를 지녔다. 교직 생활을 하면서도 남들은 토요일을 기다리는데 그는 학교 일을 하기 위해 월요일을 기다릴 정도로 일 속에 살았다.
그래서 고교 교사에서 대학 교수로 학생처장으로, 학장으로 머지않아 총장이 될 시점에 그는 암으로 쓰러졌다. 항암 치료 경과가 좋은 것 같아서 주위의 만류도 뿌리치고 다시 집무했으나 병마가 재발하여 다시 입원 수술한 후 복직하려고 하자 부인이 막았다고 했다. 욕심을 버리라고. 그는 부인 말을 좇아 지난해 퇴직한 후 요양 중이라고 했다.
죽음이 몹시도 두려웠는데 종교(가톨릭)에 귀의한 후로는 그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면서 건강을 잃으면 돈도 명예도 권력도 아무 소용없다는 체험담을 들려 줬다. 서로 건강을 빌면서 오늘 처음 만났던 장소에서 헤어져 돌아오는데 오랫동안 찌푸려진 하늘이 마침내 햇살을 비췄다.
행운이 자네를 버리지 않았네
나는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아침에 잃어버린 책을 과연 찾을 수 있을까? 내 손전화는 내 방 충전기에 그대로 꽂혀 있을까에 관심이 모아졌다. 돌아오는 길 내내 '오늘 잃어버린 책과 손 전화를 모두 다 찾는다면 그와 나에게 행운이 돌아온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마침내 안흥 버스 정류장에 내린 후 우체국 앞 공중전화 부스로 갔다. 그런데 책 봉투는 흔적도 없다. 다시 이발소로 가서 찾았더니 분명히 아침에 내가 들고 나갔다고 했다. 그냥 집으로 돌아오려니 왠지 기분이 찝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