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함께 찾아온 행운에 웃다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29) 투병 중인 친구를 만나던 날

등록 2004.09.14 01:30수정 2004.09.14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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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증 나는 가을비


며칠째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다. 비 가운데 가을비는 가장 영양가가 없는 것 같다. 봄비는 메마른 대지를 촉촉히 적시는 반가운 단비다. 여름의 한줄기 소나기는 더위를 가시게 하는 장쾌함과 시원함을 준다. 그런데 곡식이 한창 여무는 계절인 가을에 내리는 비는 여간 짜증 나지 않는다.

이미 벼 논에는 더 이상의 비가 필요가 없다. 이 즈음의 비는 오히려 가을걷이에 방해만 될 뿐이다. 겨울비는 그 나름대로 겨울 가뭄을 해소한다. 옛 어른 말씀에 따르면 "하루 가을볕은 벼 한가마와 맞먹는다"고 할 만큼 가을의 맑은 날씨는 소중하다.

텃밭의 고추를 따고도 가을볕에 제대로 말리지 못하고 며칠째 방바닥에 널어 말리고 있다. 어서 빨리 따가운 뙤약볕이 내리 쬐는 청명한 가을날이 되어 들판의 오곡도 여물게 하고, 과수원의 과일도 붉게 물들였으면 좋겠다.

오늘은 할아버지 제삿날이다. 아내는 아침 일찍 횡성에 제수 준비 겸 한우 축제 전시장 마무리를 하러 떠났기에, 혼자서 궁싯거리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받자 대학 같은 학과 친구였다.

자기는 지금 영월에서 요양 중인데 다른 친구에게 내가 안흥에 내려와서 지낸다는 소식을 들었다면서 중간 지점인 원주쯤에서 만나 점심이나 같이 하자는 제의였다. 나는 마침 오늘이 할아버지 제삿날이라 다음날로 미뤘으면 좋겠다고 청을 거절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는 오랫동안 암 투병 생활을 했는데 나는 그동안 문병도 가지 못했다. 더욱이 낯설고 물선 영월 산골 마을에서 외롭게 지내면서 친구가 가까운 곳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운 마음에 덥석 만나자는 호의를 제사 핑계로 미룬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퍼뜩 스쳤다.

곧장 전화를 걸어서 점심 시간 원주 시외터미널 공중전화 부스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서로 중간 중간 손전화로 더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를 정하자고 했다. 시간 여유는 많았지만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손전화를 보니 전원이 다 된 것 같아서 잠시라도 충전시키고자 충전기에 꽂았다. 친구에게는 뭘 선물할까 망설이다가 마침 <일본기행>이란 신간 나온 게 여분이 있어서 챙겼다.

나 자신에게 엄청 화가 났다

학교를 그만 둘 때 한 선배가 그랬다. 직장 생활을 그만 두면 양복도 거의 입지 않게 되고 넥타이 매는 일도, 이발소 가는 것도 뜸해진다고. 그 말이 맞았다. 그새 이발소를 찾지 않은 지 두 달이 된 듯했다. 이 참에 머리를 깎아야겠다고 좀 서둘러 집을 나섰다.

읍내로 가는 도중에 동네 사람이 차를 태워 줬다. 마침 원주행 시내버스가 주차장에 들어서고 있었지만 다음 차를 타기로 하고 이발소로 갔다.

안흥 장터, 허생원 조선달은 어디로 갔는지 썰렁하기 그지없다.
안흥 장터, 허생원 조선달은 어디로 갔는지 썰렁하기 그지없다.박도
오늘이 안흥 장날이었다. 이발소에는 이미 손님이 머리를 깎고 있었다.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오는 길에 깎겠다고 하자 이발사는 일단 자기 가게에 들어온 손님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금세 된다고 했다. 그 말에 마음이 약해서 대기한 후 머리를 깎자 차 시간이 다 되어서 매우 급하게 이발소를 벗어났다.

버스 정류장에 이르러 친구에게 11시 45분 차를 타고 간다고 전화를 하려는데 손전화가 없다. 이발소에 빠트린 듯하여 그곳으로 가서 뒤져도 나오지 않았다. 다시 버스 정류장에 가자 막 버스가 들어오고 있었다.

버스 기사에게 공중전화에서 잠깐 한 통화하고 오겠다고 양해를 구한 후 전화 부스에 갔다. 동전을 넣고 다이얼을 돌렸으나 돈만 집어먹고 통화가 되지 않았다. 막 출발하려는 버스를 후딱 탔다. 버스비를 셈하고 자리에 앉으니 친구에게 주기로 한 책이 없었다.

갑자기 내 자신이 싫어졌다. 잠깐 사이 두 가지나 잃어버리다니. 건망증이 보통 심한 게 아니었다. 요즘 나는 정서 불안 상태다. 나이는 못 속인다고 하더니 내가 벌써 그런 나이가 되었는가? 나 자신에게 엄청 화가 났다. 다시 마음을 진정시킨 후 버스기사에게 시외버스터미널 도착 시간을 물은 후 손전화까지 빌려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12시 50분, 원주시외버스터미널 공중전화 부스 앞에서 친구와 나는 서로 얼싸안았다. 그는 오랜 투병 생활로 초췌했지만 예상보다 건강해 보였다. 그 많던 머리숱이 반 이상 빠져서 듬성듬성하다.

그와 나, 우리는 두보의 시 <강남봉이구년(江南逢李龜年)>에서 이구년과 두보가 꽃 지는 시절에 다시 만나듯 우리도 그렇게 만났다.

그는 지방대학의 학장을 역임하다가 지난해 병으로 퇴임한 교수인 바, 우리는 대학 시절 4년을 함께 강의실을 옮겨 가면서 배웠고 학훈단 동기이기 때문에 여름 방학 병영 훈련 때는 한 내무반을 썼던 전우였다. 거기다가 교직까지 같이 이수하였기에 그야말로 4년간 붙어다녔던 지기지우(知己之友)다.

한식집에 좌정한 후 서로 안부를 묻고 들었다. 그는 매우 열정적으로 살았다. 연애도 남다르게 열심히 해서 대학 재학 중 같은 학번인 교수 딸을 부인으로 맞아 졸업과 동시에 결혼한 비상한 재주를 지녔다. 교직 생활을 하면서도 남들은 토요일을 기다리는데 그는 학교 일을 하기 위해 월요일을 기다릴 정도로 일 속에 살았다.

그래서 고교 교사에서 대학 교수로 학생처장으로, 학장으로 머지않아 총장이 될 시점에 그는 암으로 쓰러졌다. 항암 치료 경과가 좋은 것 같아서 주위의 만류도 뿌리치고 다시 집무했으나 병마가 재발하여 다시 입원 수술한 후 복직하려고 하자 부인이 막았다고 했다. 욕심을 버리라고. 그는 부인 말을 좇아 지난해 퇴직한 후 요양 중이라고 했다.

죽음이 몹시도 두려웠는데 종교(가톨릭)에 귀의한 후로는 그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면서 건강을 잃으면 돈도 명예도 권력도 아무 소용없다는 체험담을 들려 줬다. 서로 건강을 빌면서 오늘 처음 만났던 장소에서 헤어져 돌아오는데 오랫동안 찌푸려진 하늘이 마침내 햇살을 비췄다.

행운이 자네를 버리지 않았네

나는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아침에 잃어버린 책을 과연 찾을 수 있을까? 내 손전화는 내 방 충전기에 그대로 꽂혀 있을까에 관심이 모아졌다. 돌아오는 길 내내 '오늘 잃어버린 책과 손 전화를 모두 다 찾는다면 그와 나에게 행운이 돌아온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마침내 안흥 버스 정류장에 내린 후 우체국 앞 공중전화 부스로 갔다. 그런데 책 봉투는 흔적도 없다. 다시 이발소로 가서 찾았더니 분명히 아침에 내가 들고 나갔다고 했다. 그냥 집으로 돌아오려니 왠지 기분이 찝찝했다.

안흥 우체국
안흥 우체국박도
행여나 싶어서 우체국에 들어가자 저울 곁에 낯익은 책 봉투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직원에게 누가 여기에 두었느냐고 묻자 오전에 웬 부인이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주웠다면서 두고 갔다고 한다.

나는 봉투 속의 책을 꺼내 내가 바로 책 임자라고 날개를 펴서 사진과 실물을 확인시킨 후 우체국 직원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종이를 얻어다가 “기주연 학장! 행운이 자네를 버리지 않았네. 자네는 반드시 건강해질 걸세”라고 써서 책과 함께 봉투에 넣은 후 부쳤다.

집에 돌아와서 내 방을 확인하자 손전화는 그때까지 충전기에 꽂혀 있었다. 문득 하늘을 바라보자 그 새 구름이 모두 걷히고 더 없이 푸른 쪽빛이었다. 나는 기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연아, 우리는 행운을 찾은 것 같아.”
“그래, 고마워. 오늘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 보냈어.”


저녁 제사 때 나는 어느 때보다 할아버지 할머니 영전에 오래 엎드리면서 내일부터 새 일을 시작해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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