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斷腸記)- 23회

등록 2004.09.21 08:20수정 2004.09.21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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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장 손가장(孫家莊)

성명 : 서경(徐慶), 서달 대장군의 4남2녀 중 막내.
사망시기 : 영락 6년 2월
사망원인 : 기녀와 방사 중 피를 토하면서 기도가 막혀 사망한 것으로 추정.
검시관(檢屍官)은 복상사가 아닌 갑작스런 내출혈로 인한 호흡곤란으로 사망하였다는 의견임. 서장군가(家)의 요청에 의해 검시를 하지 않고 조사 중단함.


조궁의 보고서다. 상대부는 서탁에 앉자 차를 마시고 있었다. 향기가 좋기로 이름난 철관음(鐵觀音)이다.

“예상대로 서경(徐慶)의 죽음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어요.”

자춘은 상대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 날 서경을 상대한 기녀는 동기(童妓)를 갓 뗀 홍교(紅嬌)였어요. 머리를 얹어준 것도 서경이었다고 하는데 죽기 전 홍교의 얼굴 위로 피를 토하고는 죽었지요.”

복상사(腹上死)에서 피를 토하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다. 복상사는 뇌혈관이 터지거나 심장이 갑작스럽게 멈추는 것이기 때문에 내출혈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제가 보기엔 서경에게 누군가 열독(熱毒)을 먹인 게 아닌가 해요. 열독이라면 내장을 녹이고 내출혈을 일으키죠. 더구나 계집과 한창 방사 중이라면 폭발하듯 했을 테니 오히려 피를 많이 토해내지 못하고 기도가 막혀 죽는 거죠.”

그의 추측은 일리가 있다. 상대부 역시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서장군가에 이상기류가 흐른 게 그때부터였나?”
“그 때부터 부쩍 경비를 강화하고 친족들의 외출을 되도록 삼가도록 했다는 거예요.”
“누군가 서장군가를 위협하고 있다? 정말 호랑이의 간이라도 삶아 먹었나 보군.”


그는 잠시 뜸을 들여 생각하는 듯했다. 서가화의 움직임과 서장군가의 이상기류와는 분명 관계가 있었다.

“그럼 서가화가 식솔들의 안전을 위하여 소림에 간다는 거야?”

별로 가능성 있는 가정이 아니다. 단지 안전만을 생각한다면 소림사에 부탁할 이유는 전혀 없다. 서장군가의 힘은 무섭다. 황실에서 묵인해 주고 있지만 상대부 자신이 파악한 서장군가가 보유한 사병의 숫자는 거의 천여 명이 넘는다.

“….”
자춘도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다. 뚜렷하게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근데 송하령은 왜 따라 간 거야? 송가에도 무슨 일이 있나?”
“송가에 이상기류는 없었어요. 다만 서장군가에서 얼마 전 사람을 보낸 것으로 파악되었지만 무슨 의논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요. 분명 서가화 혼자 보내기 어려워 송하령을 보낸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자춘은 말끝을 흐렸다. 그 점도 이상한 일이다. 서가화의 신변안전이라면 송하령을 보낼 리 없다. 상대부는 조궁의 보고서를 덮었다.

“전영반이 서가화를 따라 가고 있으니 곧 뭔가는 나오겠지. 균대위 일은?”

자춘은 대답 대신 자신이 작성한 보고서를 내밀었다.

균대위에 관한 건.

설치시기 : 대명 건국 전후라고 추정
목 적 : 밝혀진 바 없음. 다만 태조의 개국공신 숙청시 활동 , 반황실단체인 오중회의 요인들 암살 등 수행.
인 원 : 추정 불가. 최소 100여명은 넘을 것으로 추산.
구 성 원 : 신원 파악 불가.
금의위와의 관계 : 홍무 15년에 설치된 금의위 이전에는 누가 지휘했는지 알 수 없음. 금의위 설치 후 금의위내 군령부(軍令剖)라는 특수기구에서 관할하고 있었다고 파악됨.
군 령 부 : 총인원은 7명. 군부(軍部)를 감찰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된 조직이나 군부를 감찰한 기록은 전혀 없음. 금의위에 지출한 자금의 사분지일 정도가 군령부로 흘러 들어간 것으로 보아 균대위와 선황과의 연결고리라 사료됨.
군령부는 홍무 25년 남옥대장군 숙청사건 바로 전 폐지되었음. 그와 함께 균대위의 활동도 중지되었음.

“금의위의 폐쇄성과 최근 수뇌부들이 교체된 관계로 더욱 조사하기 어렵게 되었어요.”

자춘은 부실하게 작성된 조사내용을 변명하는 듯 했다.

“군령부에 소속된 신원들은 파악되었나?”
“인사에 관한 사항은 금의위 내에서도 일급비밀이예요. 더구나 폐지된 기구의 인물들의 서류를 보려면 도독(都督)의 재가를 얻어야 하죠.”

어려운 일이다. 아직 금의위의 위세는 건재하다.

“균대위라는 비밀조직을 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어. 물론 개국 초기 황권에 반대하는 자들을 비밀리에 제거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지. 선황의 성격으로 봐서 가능성이 충분해.”
그래도 미심적은 부분이 많다. 상대부는 더 자세히 조사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이제부터 균대위에 관한 일은 전영반에게 맡겨라. 금의위 출신이니 인맥을 활용해 밝혀 낼 거다. 전영반에게 인원도 십여명 추가해 지원해 주고….”

전연부를 말하는 것이다. 그라면 믿을 수 있다. 그는 상대부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자세하고 정확한 조사를 해 낼 것이다.

“문제는 오중회야, 북경에서도 가장 신경을 많이 쓰고 있어.”
“현재는 천지회(天地會)로 바뀌었죠.”
“그들은 십여 차례에 걸쳐 선황을 살해하고자 기도했어. 선황의 장남인 의문태자(懿文太子)는 병사한 것이 아니라 오중회의 암살(暗殺)이라는 말도 있어.”

의문태자(懿文太子)는 태조 주원장의 장남이고 영락제의 형이며 건문제(建文帝)의 부친이다.
그가 홍무 25년에 죽게 되어 태조는 손자 건문제(혜제)에게 황위를 물려주게 되면서 숙부가 조카를 죽이는 골육상쟁의 전쟁 - 정난의 변이 일어났던 것이다.

“오중회가 그 정도까지 힘이 있었나요?”

의문태자의 사망은 의혹이 몇 가지 있기는 하였다. 태조가 마음에 안 들어 했던 부분이 의문태자의 신체와 성격이었다. 우유부단한 성격에 다른 아들과는 달리 약해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죽을 정도로 몸이 약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 그가 죽자 황실 내에서도 병사가 아닌 반황실단체의 암살이나, 잔존 개혁공신들의 모살(謀殺)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었다. 의문태자가 죽은 후 1년이 채 못 되어 태조의 개국공신의 마지막 숙청작업이었던 남옥대장군의 숙청이 이루어진 것도 소문과 연관이 없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오중회는….”

오중회(誤中會)

명 초기의 비밀결사조직으로 반황실단체다. 이들의 시작은 태조 주원장의 열등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주원장의 부친 주세진(朱世珍)은 가난한 소작농(佃農)이었고, 어머니는 무녀(巫女) 진(陣)씨의 딸이다. 출신을 보면 하층민 중 천민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글을 읽을 줄은 알되 쓸 줄을 모른다는 그의 무식함이 의심 많은 그의 성격과 맞물려 대명을 건국한 지 7년만에 필화(筆禍)라고 할 수 있는 문인들의 숙청이 시작된다.

문자(文字)의 옥(獄)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명대 최고의 시인(詩人)으로 알려진 고계(高啓)와 함께 오중사걸(吳中四傑)이라 일컬어지고 있던 양기(楊基), 장우(張羽), 서분(徐墳) 등을 처형한 사건이다.

주원장은 관리들이 상주하는 문서와 시문을 조사해 그의 과거 행적과 관련되는 것이 있으면 처벌했다. 대머리처럼 빛난다는 의미의 광(光), 민둥산이라는 독(禿), 도적의 적(賊)과 발음이 비슷한 칙(則), 승(僧)과 발음이 비슷한 생(生) 등의 글자를 쓴 것이 있으면 무조건 처벌했다. 이것은 주원장이 승려생활을 할 때 머리를 깎았었고, 홍건적 집단에 가담했던 자신의 과거를 들추어 비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절강부학의 교수(敎授)가 올린 ‘작칙수헌(作則垂憲)’이라는 글귀가 있었다. 이 글귀는 “법제를 만들고 법도를 후세에 전한다”는 좋은 뜻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칙(則)’ 발음이 ‘적(賊)’ 발음과 같다. 주원장은 그가 자신을 ‘도적놈’이라고 비하했다 하여 처형하였다.

항주부학의 교유(敎諭) 서일기(徐一夔)라는 사람이 올린 글에는 “광천지하(光天之下) 천생성인(天生聖人) 위세작칙(爲世作則)”이라는 부분이 있었다. 이 문장은 “밝은 천하에 하늘이 성인을 내시어 세상을 위해 법제를 만들었다”는 뜻으로 각종 문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문장에는 주원장이 싫어하는 까까머리(光), 승려(生), 도적(則)과 발음이 유사한 글자가 세 자나 포함되어 있다. 사형은 당연했다.

이 사건 이후로 관료들 뿐 아니라 문인들은 글쓰기를 중단했고, 재야학자나 문인들은 자연스럽게 주원장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되었고 그들만의 모임을 결성했다. 그것이 오중회다. 최고의 문인이라 일컬어지는 오중사걸을 기린다는 의미였다.

사실 초기의 오중회는 단지 글로서 황실 - 특히 태조 주원장에 대한 비판의 글을 대중에 유포시키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홍무 13년에 일어난 호유용(胡惟庸)의 옥(獄)이 일어나면서 그 성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개국공신이었던 호유용이 모반을 위하여 왜(倭)와 북원(北元)에 밀사를 파견하였다는 모반죄로 처형을 당했는데 그의 일가족은 물론 그에 연루되어 처형된 자가 일만오천(一萬五千)명에 달하는 대옥사 사건이었다.

호유용은 태조와 같은 동향 출신의 개국공신으로 학문과 인격을 겸비하고 있었던 인물이었으나 그것이 화근이었다. 주원장은 남들에게 존경받고 뛰어난 자는 자신의 황권에 위협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를 이후로 오중회는 문사들의 집단에서 무인들이 가세한 비밀결사조직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옥사로 죽은 후예들이나 밀려난 무관들까지 가세하고, 무림인들 중에 관련있는 자들도 여기에 가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럴수록 주원장의 숙청작업은 집요해졌다. 대옥사가 있은 후 10년 뒤인 홍무23년에 제 2차 호유용의 옥이라 일컬어지는 대옥사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때에도 이선장(李善長) 일족 등 개국공신을 비롯, 명 건국시 큰 도움을 주었던 강남의 대지주나 토호세력들까지도 연좌되어 처형되었는데 그 숫자가 삼만(三萬)에 이르는 대 숙청작업이었다.

그 사건이 있은 뒤 3년이 지나 일어난 남옥(藍玉)의 옥사는 남옥 대장군을 비롯 조진(曹震), 장익(張翼), 첨휘(詹徽) 등의 문무관들도 모반죄의 공모자로 몰려 처형된 사건으로 숙청작업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사실 유기(劉基)나 서달대장군과 같이 일찍 죽은 개국공신들 외에는 모두 숙청을 당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주원장은 황권의 강화에 중점을 두었다. 이에 따라 오중회도 극히 비밀스런 단체로 변질되어 갔고, 주원장의 암살기도도 계속되었다.

더구나 금의위가 설치된 이후에는 오중회의 인물이 발견되면 즉시 처형되었고, 그 일가족도 무사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중회는 끈질기게 명맥을 유지하다가 태조 말년에 천지회(天地會)로 이름을 바꾸면서 태조의 암살 보다는 억울하게 숙청된 개국공신과 강남의 대지주 등의 복권(復權) 등으로 목적을 바꾸면서 현재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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