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斷腸記)- 37회

등록 2004.10.19 07:31수정 2004.10.19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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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스며든 손가장은 다른 때와 달리 조용하고 음습한 분위기가 흘렀다. 이미 두 명의 죽음이 가져 온 두려움은 어두워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온 집안의 여자들 뿐 아니라 모두 불안감에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불안감만이 가중되고 쑥덕거림이 여기저기서 흘러 나왔다.

그들의 불안감을 반영하듯 세 번째 죽음이 일어났다. 그러나 전연부가 예측했던 아취(娥翠)라는 시녀는 아니었다. 오늘 아침 조반을 먹을 때 급히 들어와 언수화의 죽음을 고하던 아앵(娥櫻)이란 소녀였다. 그녀는 자신이 기거하는 상화각의 소각(小閣) 측간에서 죽어 있었다.


아마 소피를 보다가 암살된 것으로 보였다. 치켜올려진 치마를 내리지 못한 채 고의가 엉덩이에 반쯤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소피를 보려고 했던가, 아니면 소피를 모두 보고 일어나다가 당한 것 같았다. 그녀는 중요 부분을 적나라하게 내 보인 채 엎어져 있었다.

갈유와 전연부의 조사가 시작되었고 사인(死因)은 명문혈(命門穴)을 짚여 즉사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언수화의 회음혈을 짚은 것과 수법도 동일했다. 결국 언수화와 아앵의 죽음은 동일인이 저지른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전연부는 죽은 아앵의 주인인 윤소소(尹少沼)에게 물었다.

“이 시비는 오늘 계속 이곳에 있었소?”

윤소소는 보통 키에 마른 체형의 여자였다. 피부가 하얗다 못해 창백할 정도로 보였으나 계란형의 얼굴에 선연한 아미가 그녀의 미모를 돋보이게 하였다.


“아침에 큰마님께 야단을 맞고 들어와 풀이 죽어 있었어요. 그러다 누구를 만난다고 나갔다가 오후에 돌아왔는데 피곤해 보여 쉬라고 했지요… 흑….”

윤소소의 갸름한 눈에 눈물이 맺혀 흘렀다.


“발견한 시각은 언제쯤이오?”

“저녁시각이 다 되도 아무런 기척이 없길래 아픈가 하여 들어와 보니 이렇게….”

얼굴이 창백한 여자의 눈물은 보기 안타깝다. 윤소소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누굴 만난다고 했는데 누군지는 말하지 않았소?”
“모르겠어요.”

그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흑… 동생 같은 아이였는데….”

주위를 아무리 살펴도 더 이상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아앵의 얼굴엔 전혀 놀란 기색이나 당황한 표정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기습을 당한 게 틀림없다. 범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죽었다는 말이 된다.

측간이란 곳은 좁다. 이 좁은 공간에서 아무리 무공을 익히지 않은 소녀라 해도 이렇듯 완벽하게 상대가 모르는 가운데 살인을 하기는 어렵다. 범인은 대단한 무공을 가지고 있는 자다. 또한 죽은 시각을 계산해 보니 자신들이 두 번째 죽은 아연이란 시비의 사인을 조사하고 있을 때다. 어쩌면 범인은 자신들의 움직임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시비의 방을 나올 때 소식을 들은 손불이가 뛰어 왔다.

“또…?”

이젠 한탄할 기력도 없다는 표정이다. 그가 뭐라고 하기 전에 윤소소가 손불이의 품에 안기며 서럽게 흐느꼈다.

“흐…흑… 대인….”

“그래… 그래 얼마나 놀랐느냐… 진정해라.”

손불이는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며 달랬다. 갈유는 손불이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굳히며 걸어나갔다.

“여기 정리하고 잠시 후에 보세.”

갈유는 계속되는 살인에 아무런 대책도 없고 범인도 잡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며 손불이에게 미안해했다. 그것은 금의위 명영반이라는 전연부도 마찬가지였다. 범인은 이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데 자신들은 범인의 윤곽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갈유를 따라 현장을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자죽헌(紫竹軒)에 모인 그들의 얼굴은 어두웠다. 이곳의 탁자에 놓인 찻잔은 모두 열두 개였다. 손불이, 갈유 부자(父子), 담천의, 전연부, 구양휘와 팽악, 무당사형제 삼인과 소림의 두 고승이 그 찻잔의 주인들이었다.

일행 중 여자인 서가화와 송하령만 빠진 상태였다. 갈유와 전연부 만이 이 사건을 해결하려다 오히려 일만 더 커지자 그들 모두의 힘을 빌리고자 모두 모인 것이다. 전연부는 세 명의 죽음에 대해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모두 동일범의 소행이 아닐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피살자들과 잘 아는 내부인의 소행이라고 생각되오이다.”

그 말을 끝으로 그의 조사 보고는 모두 끝이 났다.

“아미타불… 극락왕생 하시길….”

혜각대사가 죽은 자들을 위해 불호를 읊조리고 말을 이었다.

“범인의 살해 동기나 목적을 추측할 수 있겠소이까?”

그것이 중요하다. 일단 살인사건의 현장검증이나 범인의 인상착의, 사인 등은 중요한 객관적 자료이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주관적인 동기와 목적이다.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전연부는 고개를 떨구었다. 미궁에 빠질 사건들을 수십 차례나 해결한 금의위 전영반의 명예는 간 곳이 없다.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계속되는 살인으로 보아 아직 목적을 이룬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무당의 현진도장의 사제 현학도장(玄鶴道長)의 말이었다. 현학은 삼십대 중반의 영기가 서려 있는 인물이었다. 체격은 보통이었지만 그의 얼굴은 맑고 시원해 잘생긴 도인이었다. 그는 무당 내에서 총기가 뛰어나다고 인정되는 사람이다. 현진이 사제 현학을 데리고 이 자리에 온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동감이오.”

전연부는 은연 중 이 자리의 주관자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기사 이런 일에는 전연부 보다 나은 인물이 없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얼굴을 제대로 들 수 없었다.

“전영반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일단 언마님에게 대한 살의(殺意)가 이 사건에 대한 열쇠가 될 것 같습니다. 그 뒤에 일어난 사건은 그 살인에 대한 단서나 빌미를 제공할 수 있는 증거를 없앤 것에 불과하지요.”

현학의 말은 논리정연했다.

“그렇다면 언마님과 두 시녀간의 관계를 살펴보면 되겠군요.”

“그렇지요.”

전연부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아연과 아앵 그리고… 언마님… 그렇다면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아앵의 주인인 윤작은마님이란 말인데….”

“범인이 자신의 시비를 자신의 거처에서 죽이겠습니까? 오히려 그분을 범인으로 몰려는 음모일 가능성이 높지요. 만약 범인이 다음 범행을 생각한다면 그 첫번째 대상이 될 수도 있구요.”

현학도장의 말은 명쾌했다. 그것은 범인이 나 여기 있소 하는 말이다.

“또한 언마님의 현재 시비인 아취란 소녀도 살아 있습니다.”

“바뀐지 얼마 안되었으니 살해동기나 목적이 된 사실을 모르기 때문일까요?”

“그렇게 보아야겠지요. 혹시 윤(尹)마님과 사이가 안 좋은 분이 있습니까?”

손불이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특별히 들어본 바 없네.”

그 때까지 가만히 있던 담천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 짧은 소견이지만….”

“편하게 말해 보시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면면이 대단한 사람들이다. 이런 자리에서 무명소졸인 담천의가 아무리 담이 커도 말하기 어렵다. 그런 사정을 짐작한 갈유가 배려한 것이었다.

“범인은 아무래도 여자, 그것도 무공이 고강한 여자일 것 같군요.”

“그건 아닐 것 같소.”

전연부의 확신에 찬 말이었다. 그와 갈유는 언수화가 죽은 상태를 알고 있다. 흥분된 와중에서 죽었다는 말은 손불이와의 약속 때문에 말을 하지 못했을 뿐이다. 담천의는 전연부의 확신에 찬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전영반께서 왜 그렇게 확신하는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사체의 설명을 들어보면 장인(掌印)이 작다는 점, 지력(指力)을 이용해 적당한 정도만 사용해 흔적이 크지 않다는 점, 그리고 살해당한 사람들 모두가 범인과 무척이나 친한 사람이었다는 점, 살해당한 장소가 남자들은 접근하기 어려워 누군가 발견할 수 있었는데도 범인에 대한 목격자가 없는 점 등을 보면 남자는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 말에 갈유와 전연부를 제외한 좌중의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의 설명을 들으니 범인이 여자일 것이라는 생각에 동의한 것이다.

“하지만….”

전영반은 말하다말고 손불이를 바라보았다. 설명을 해도 되는지 허락을 구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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