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斷腸記)- 38회

등록 2004.10.21 07:32수정 2004.10.21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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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불이는 망설이다가 자신이 직접 입을 열었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담소협의 생각이 옳은 듯하여 이야기를 안 할 수 없구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집안의 치부를 드러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수화는 방사 중에 죽었다 하오. 이 친구가 확인 했으니 맞을 것이오. 누군가하고 방사를 나누던 중에 그 상대방이 회음혈을 눌러 죽인 것이오.”

좌중은 그제야 이해를 했다는 표정이었다. 아까 전연부가 언수화의 죽음을 설명할 때 어떻게 그런 은밀한 부위를 공격했을까 궁금해 하던 의문도 풀렸고, 전연부가 여자가 아니라고 말한 것도 이해되었다.

“아니야, 방사란 것도 반드시 남자하고만 한다는 법은 없지?”

갑작스레 손불이가 머리를 가로 저으며 혼자 말로 중얼거렸다. 사실 누가 들으라는 말도 아니었고, 자신의 생각이 은연중에 흘러나온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의 뇌까림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이 방에 없었다. 갈유가 무릎을 치더니 탁한 목소리로 동의했다.

“자네 말이 맞을 수 있어. 조사하면서 범인은 무조건 남자라고 생각했기에 어긋나지 않았을까?”


자신에 대한 질문이었고, 또한 같이 조사한 전연부에게 묻는 말이었다.

“우리가 언씨의 시신을 조사할 때 손톱자국을 남기지 말라고 했지?”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는 말 대신 아까워 같이 얇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수투(水套)를 꺼내 보였다. 특별히 조사할 때 사용하는 전문적인 장갑(掌匣)이었다.

“맞아, 자네는 수화의 몸에 손톱자국을 남기지 않았어. 하지만 수화의 몸에는 손톱자국이 남아 있었단 말이야. 남자가 특별히 손톱을 기를 이유가 있을까?”
“앵(罌)을 하는 남자라면 새끼손가락의 손톱을 기르기도 하지요.”
“바로 그거야, 남자라면 앵속(罌粟, 양귀비)을 하는 사람. 그렇지 않다면 범인은 여자야.”

점점 흐릿했던 증거들이 꿈틀거리며 살아나고 있었다.
“오히려 여자라고 확신이 드는군. 남자하고 통정했다고 가정하면 언씨야 방심했다고 하지만 입을 막으려 죽인 두 명의 시비들은 오히려 범인을 경계하지 않았을까? 또한 언씨는 그토록 흥분했음에도 남자의 성기가 삽입되지 않은 상태였어.”

전연부도 이제야 어느 정도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왜 조사가 한발자국도 진전되지 못하고 맴돌았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언씨의 음모(陰毛)에서도 타액의 흔적이 발견되었지. 손과 입으로만 애무한 거야.”

조사자가 주관적인 자기 확신에 사로잡히면 자기 고집으로 인해 진범(眞犯)을 놓치고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아가는 경우가 많다. 명포두라 하더라도 그런 자기 확신에 사로잡혀 사건을 더욱 미궁에 빠지게 하는 경우도 많이 보아왔다.

“그렇군요. 우리는 방사라는 상황에 집착해 고정관념에 빠져 있었습니다. 제 실수로군요.”

잘못을 인정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이런 중대한 사건에 있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란 더욱 어렵다. 하지만 전연부는 인정했다. 그는 이제야 확고한 조사방향을 잡기 시작했다. 범인이 남자일 거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오늘 하루를 보내는 동안 두 명이 더 살해 되었다.

“우리 일행이 도착한지 하루 만에 세 건의 살인이 일어났소. 우연의 일치라고 지나치기 어렵소. 아무리 내부자의 소행이라도 우리와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 같소.”

갈유는 자책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친구 집에 와서 친구집안을 이렇게 흉흉하게 만들었으니 모두 자기 탓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한 사람이면 몰라도 세 사람이 살해 되었다면 아니라고 할 수 없지요. 문제는 우리와 연관되었다 한다면, 표물 밖에 없는데….”

갈유의 자책에 처음으로 입을 뗀 구양휘가 갑자기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표물? 그렇군. 여태까지 왜 그걸 놓치고 있었지?”

갈유와 전연부가 생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허나 딱히 연관시킬 이유가 없어 접었던 것인데 불현듯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전연부 역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표물은 어디에 있지요?”
전연부의 질문에 손불이는 바로 대답했다.

“마장(馬場)에 마차채 넣어 두었네. 말들은 풀러 마장에 넣어 두었고.”
“구양대협께서는….”

전연부의 말에 구양휘는 이미 같은 생각이었던 듯 담천의를 바라보았다.
“천의와 함께 천고헌으로 가겠소. 전영반은 표물을 조사해 보시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마장에 있는 표물이 진정한 표물이 아님을 안다. 진정한 표물은 송하령과 서가화가 가지고 있다. 이미 자시가 되어 가는 시각. 범인의 목적이 표물이라면 표물과 두 여인에게 손을 쓸 가장 적당한 시간이고, 기회였다.

“알겠소이다.”

전연부는 갈유와 함께 빠르게 뛰어 나갔다. 구양휘와 담천의가 천고헌을 향하자 갈인규와 팽악이 그 뒤를 따랐다. 방안에는 갑작스런 변화에 손불이와 무당에서 온 세 사람과 소림의 두 고승만 남겨졌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 역시 불안한 모습이었다.

“사숙. 소질도 천고헌으로 한번 가 보아야겠습니다.”

혜각대사가 광무선사에게 조용히 말하자 광무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와 함께 현학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을 건넸다.

“빈도도 대사님을 따라가겠습니다. 함께 가시지요.”
말은 허락을 구하고 있지만 몸은 어느새 문 앞을 나서고 있었다.

소림과 무당, 그들의 손가장 방문 목적이 어렴풋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10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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