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斷腸記)- 44회

등록 2004.10.29 07:35수정 2004.10.29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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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 장 범인(犯人)

그는 잠을 자지 않았다. 모두 천고헌 내 배정된 방에 들어가 눈을 붙였지만 그는 자신의 방에서 나와 별빛이 쏟아지는 하늘 아래 앉아 있었다. 아침부터 운기에 몰입했던 그는 더할 수 없이 전신이 상쾌한 듯 보였다.


그의 그런 모습을 모를 갈인규도 아니었지만 모른 체 했다. 그는 담천의가 송하령을 걱정해서 정원에 나와 밤을 새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담천의는 자신의 정신세계와 몸이 깨어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봇물처럼 터지기 시작한 깨달음은 그를 잠시라도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고 바람 소리와 나뭇잎 소리와 벌레 소리를 들었다. 그는 벌레가 기어가는 소리와 물 속에서 움직이는 물고기의 유영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는 자연의 모든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 속에 빠져들었다.

자연의 기운과 하나가 될 때 그는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법열(法悅)의 기쁨을 맛보았다. 한번 봇물처럼 터져 나온 깨달음은 그를 더욱 높은 세계로 이끌고 있었다. 자연이 깨어나고 해가 나뭇잎에 묻은 이슬을 털어낼 때 그는 자연과 같이 깨어났다.

사람들도 깨어나고 있었다. 특히 서가화와 송하령이 방문을 열고 나오고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를 보았을 때 서가화는 송하령을 보고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언니는 좋겠수. 이러다 저 인간 보고 곧 형부라고 불러야 하는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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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장의 안주인인 경여의 거처로 들어선 것은 손불이를 비롯하여 전연부 일행이었다. 하지만 소림과 무당의 사람들과 서가화와 송하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들어간 사람들은 담천의를 비롯 일곱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손불이의 처와 첩실들이 모두 앉아 있었고, 그에 딸린 시비들도 함께 모여 있었다. 아침을 같이 하자는 경여의 지시도 있었지만 그들의 안전을 위한다는 취지였다. 지금까지 죽은 사람은 네 명이었지만 세 명이 이들 속에 있다 이미 사라진 것이다.

전연부는 모여있는 손불이의 처와 첩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이렇게 많은 여자들이 어울려 살면서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게 오히려 더 이상했다. 첩실 한두 명만 있어도 집안에 시끄러움이 끊이질 않는다. 손불이의 능력이 뛰어난 것인지 경여의 현명함이 도에 지나친 것이지 알 수 없다.

“여기 모이시라고 한 것은 이미 짐작을 하고 있으시다시피 같이 지내온 세 사람의 죽음 때문입니다.”

손불이와 갈유는 이미 창가 쪽에 놓여진 의자에 가 앉아 있었다. 전연부는 자신들에게조차 어떻게 할 것인지 말하지 않았다.

“무척 놀라셨을 줄 아오나 어제는 손가장 내의 남자들을 모두 조사했습니다.”

“그럼 오늘은 여자들을 조사할 차례인가요?”

입을 연 여인은 사십대 중반의 여인이었다. 소실로는 첫째인 한미령(漢美玲)이었다. 젊었을 적엔 온몸에 교태가 흐르던 여인이었을 것이다. 사십이 넘은 지금도 그 교태는 은연 중 비치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다만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그제 저녁부터 오늘 아침까지 어떠한 일을 하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시각에 따라 있었던 장소나 했던 일… 아 그리고 누구와 같이 있었다면 오히려 좋겠지요.”

이건 범인을 잡겠다는 것인지 풀어주겠다는 것이지 알 수가 없다. 불쑥 물어도 모자를 판에 이곳에 범인이 있다면 아예 정답을 가르쳐주고 미리 준비하라는 뜻이다.

“우선 마님들부터 먼저 하겠습니다. 귀찮으시더라도 차근차근 대답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갈인규는 어느새 경여 옆으로 가 있다. 그와 몇 발자국 옆으로 담천의가 서 있었고, 구양휘와 팽악이 문을 막고 서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아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큰마님께서는 어제 그 충격으로 몸이 편찮으셔서 하루 종일 방안에 누워 계셨으니 물을 것도 없지요. 그리고….”

전연부는 경여의 옆에 앉아 있는 삼십대 후반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둘째마님이시지요?”

손불이의 두 번째 처인 허영경(許英景)이다. 스물이 채 못되어 손불이의 두 번째 부인이 된 여자다. 그녀는 경여가 삼십 중반이 넘어서도 아이가 없고, 사십에 접어든 손불이를 생각해 경여가 직접 맞아들인 여자다.

더구나 그 때 경여에게는 갓난아기였던 갈인규가 있어 그녀의 온 정신은 갈인규에게 가 있을 당시였다. 그래서 손불이를 위해 첩실이 아닌 처로 맞아들인 것이 허영경이었다. 피부가 검은 편이나 아직도 살결에 윤기가 흐르는 동그란 얼굴의 미녀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까지 자기주장이나 의견을 말해 본 적이 없는 보기보다 소극적인 여자였다.

“예… 소첩은….”
“아… 알고 있습니다. 둘째마님께서는 어제 오전부터 큰마님 곁에서 저녁까지 계셨지요. 저녁도 큰마님과 같이 드신 후 늦게 처소로 돌아가시지 않으셨습니까?”

이것은 일종의 경고일 수 있다. 또한 고도의 심리전일 수 있다. 전연부가 대답을 준비하라고 한 것에는 이런 함정이 있었다. 이미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의 움직임은 다 알고 있으니 알아서 대답하란 소리다. 전연부와 같은 전문가가 대답하기 쉬운 질문을 던질 때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간(簡) 작은 마님은 중추절(仲秋節) 음식준비로 바쁘셨죠? 아… 한 작은마님도 따라 가셨나요?”

간효용(簡效容)은 소실로는 둘째다. 음식솜씨가 워낙 뛰어나 주방 일을 관리하며 전문 숙수가 없거나 부족할 때에는 그녀가 직접 한다. 특히 명절음식이나 잔치가 있을 때엔 그녀가 모두 맡아서 처리하기 때문에 중추절을 앞 둔 이 때가 가장 바쁘다.

“예… 한언니와 같이 물건을 흥정했어요.”
“본장을 떠나신 시각이 어제 진시(辰時) 초 였나요?”

“아닐 거예요. 어제 조반을 주방에서 대충 먹고 나갔으니 진시 말이나 사시(巳時) 초 정도일거예요.”

“한 작은 마님과 같이 나가셨던가요?”

간효용은 자신에게 자꾸 질문을 하는 전연부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한미령과 어제 같이 다닌 것은 사실이나 한미령에 대한 일은 본인에게 물어 보면 될 것 아닌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그녀는 내심 겁이 덜컥났다.

“마장(馬場)에서 만나 같이 나갔어요. 아매(娥梅)와 추국(秋菊)도 같이 갔지요.”

아매(娥梅)는 그녀의 시비고, 추국은 한미령의 시비다. 그때 팽악이 전연부를 나직이 불렀다.

“전영반. 잠깐 오시지요.”

전연부는 팽악을 보다 문이 약간 열려진 것을 보고는 문으로 걸어갔다. 밖에 자신이 데리고 온 포두 두명이 보였다.

“죄송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는 좌중에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좌중은 묘한 흐름이 흐르고 있었다. 경여 역시 아무말 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켰고, 손불이 역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전연부가 이곳에 들어오면서 누구와도 말을 하지 말 것을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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