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斷腸記)- 61회

등록 2004.11.23 07:33수정 2004.11.23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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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 장 이별(離別)

사람의 삶이란 정말 묘한 것이다. 노력하는 자는 그만한 결과를 받는다. 하지만 노력했다 해서 모두 대가를 받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바라는 결과를 얻지 못하는 사람이 오히려 많다. 그러다보니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벗어나지 못하는 게 대부분이다.


더구나 그 굴레를 벗어났다가도 언젠가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그것이 운명(運命)이라는 것일까?

담천의는 자신의 삶을 포기했다. 그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 그는 그가 가야할 길을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자신이 가야할 길로 돌아온 것이다. 만물표국을 떠나온 날부터 지금까지 이십여일이 채 못되는 기간동안 그에게 일어난 일은 살아 온 기간보다 더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일행과 함께 지객당으로 돌아 온 담천의는 객방을 나왔다. 송하령과 말을 나누려 하면 눈총을 주는 서가화에게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서 객방을 나와 천림해로 발길을 돌린 것이다.

그의 머리 속은 온통 자신이 부모의 원수라고 생각해 왔던 금의의 중년인에게 가 있었다.

그는 누굴까? 그는 왜 자신에게 무공을 익히게 하였을까?


그가 가장 먼저 할 일은 바로 자신을 거두어 준 그 사부 아닌 사부를 만나야 하는 일이다. 그가 원수이던 아니던 간에 그를 만나면 확실해 질 것이고, 자신의 신세에 대해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부 아닌 사부는 자신의 부친이 공손하게 대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대단한 위세를 가진 사람이 분명했고, 부친과는 각별했던 사이였음이 분명했다.

혼란스러운 머리 속을 털어 버리며 내일 아침 그는 이곳을 떠나 자신이 머물던 초옥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천림해는 어둠 속에서도 그 모습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었다. 오히려 밤에 보는 천림해의 모습은 바다와 같았다. 햇볕에 반짝이는 파도와 같이 천림해는 달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달이 밝다. 약간 일그러진 모습이나 곧 일년 중 가장 달빛이 밝다는 만월(滿月)이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몇 일 후면 중추절(仲秋節)이다. 인간의 삶이란 것도 달과 같다고 생각했다. 휘황하게 빛을 뿌리는 보름과 그믐의 차이는 삶의 질곡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후…… 아….”

그는 심호흡과 함께 기척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허… 중생의 삶이란 고해(苦海)일지니….”

약간 비틀거리는 걸음이다. 달빛 아래 파르라니 깍은 머리와 계인, 가사를 걸쳤으니 분명 승(僧)이 분명 할텐데 다가올수록 술냄새가 진동을 한다.

이곳은 소림이니 분명 소림에 몸담은 승려가 분명할 것이다. 하지만 소림 경내에서 술 먹는 소림승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이건 분명 기사(奇事)다.

“어… 그러고 보니 시주는 아까 달마원에서 성질 더러운 사부와 같이 있었던…?”

가까이 다가 온 청년승은 기이한 미소를 띠었다. 머리엔 분명 아홉계의 계인(戒印)이 있으니 소림사 내에서도 적잖은 위치다. 하지만 얼굴은 이십대 초반의 이목구비가 뚜렷한 모습이다. 발그레한 모습이 오히려 나이보다 더 어리게 보이게 하고 있다.

“광무선사의 제자이시오?”

담천의는 갑자기 호기심이 일었다. 소림에서 가장 무섭다고 소문난 광무선사다. 그런 그에게 저런 제자가 있었다니 놀랍다.

“흐흐… 맞소… 사부의 단 하나 밖에 없는 제자는 맞소.”

몸은 흐트러져 있으나 눈빛은 맑고 깊었다. 입가엔 세상을 조롱하는 듯한 웃음이 걸려 있으나 파계승은 아닌 것 같다.

“모두들 방장실에 가 지객당엔 아무도 없을 것 같아 왔더니… 시주는 사부와 방장실로 가는 것 같더니 여긴 웬일이오?”

이쯤 되면 적반하장이다. 이곳은 지객당이니 손님이 있을 곳이지 소림 승려가 있을 곳은 아니다.

“소림에 온 일이 끝났으니 내려왔소.”

“목에 힘께나 준 노인네들은 아직도 방장실에 있는 것 같던데….”

아마 각파의 장문인들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하는 말마다 절도와 예의가 몸에 배인 소림 승려와는 전혀 다르다.

“우리 일행만 먼저 내려왔소.”

“헌데 시주는 무슨 고민이 있소? 일행들과도 떨어져 나와 있는 것도 그렇고 왜 한숨은 자주 내쉬는거요?”

“그저 생각할 일이 있어서….”

“생각은 무슨… 생각한다고 고민되는 일이 해결되오? 그저 걱정거리가 있으면 있는대로…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거요. 살다보면 없어지기도 하고 생기기도 하는 거지.”

나이답지 않게 말하는 것은 노인네들 하는 말만 골라한다. 그러다말고 문득 생각난 듯 그는 손에 쥔 호로병을 불쑥 담천의에게 내밀었다.

“이게 약이오. 한 모금 마시고 나면 생각이 싹 없어질 거요.”

그는 말과 함께 호로병을 담천의의 손에 쥐어주며 그의 곁으로 털썩 앉았다. 찰랑거림을 보니 분명 술이 담겨있다. 마개가 열린 입구에서 새어 나오는 주향(酒香)이 예사롭지 않다. 그 호로병을 받아든 담천의는 난감하기 짝이 없다. 여기는 소림이다. 아무리 상대가 소림승이라 해도 좋은 일은 아니다.

“자고로 곡차란 옛부터 소수추(掃愁湫)라고 했오.”

소수추(掃愁湫)란 '온갖 시름을 씻어버리는 비'라는 뜻이다. 술이란 것이 근심을 거둬 갈 수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심사에 청년승이 권하자 호로병을 입에 대고 두어 모금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후욱--!”

독했다. 목에서 불이 난 듯 타올랐다. 별로 술을 잘하지 못하는 담천의다. 술을 먹어본 기억도 몇 번 없다. 표사 시절 마지못해 끌려가서는 몇 잔 먹어 본 경험이 다다. 이런 술은 먹어 본 적도 없다. 향기가 좋고 감미로운 것 같아 넘기다 보니 이건 예사로 독한 게 아니다.

“허… 시주는 술을 마실 줄 모르는구려. 술이란 모름지기 처음에는 조금만 입에 넣고 그 향기를 음미하는 것이오. 그것은 또한 우리 육신 중에서 가장 간사한 혀를 잠시 속이고 위에는 이런 것이 들어간다고 예고를 해야 하는 것이라오.”

승려에게 듣는 주도(酒道)는 기묘한 감흥을 일으켰다.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수양과 규율에 있어 가장 엄격한 소림이다. 소림에 이러한 승려가 있다는 것 자체가 믿지 못할 일이다. 더구나 사천왕을 닮은 광무선사의 유일한 제자라니 더욱 그렇다.

“그런 후에 잔이 있으면 한잔 가득을, 병이라면 한 모금 가득을 한번에 마시는 것이오. 그러면 입안에는 향기가, 뱃속에서는 사르르 술기운이 퍼지는 것이오. 그러한 향기와 느낌을 가질 때 비로소 주도(酒道)에 입문했다고 볼 수 있소.”

어처구니가 없다. 담천의의 뱃속에서는 이미 화끈하게 달아 오르고 있다. 속이 쓰릴 지경인데 주도 타령이라니….

“이리 줘 보시오.”

담천의의 고충은 아랑곳없다. 그는 담천의가 가지고 있는 호로병을 빼앗듯 낚아채 한 모금 가득 마셨다.

“카---아---! 이 얼마나 훌륭한 음식이오.”

입술에 묻은 술방울 한 알까지도 혀로 핥으며 그는 다시 호로병을 담천의에게 건네주었다.

“다시 한번 마셔보시오. 아… 물론 억지로 권하는 것은 아니오.”

담천의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술을 마셔 본 적이 거의 없소. 더구나 이렇게 독한 것은 처음이오.”

“자고로 술은 독해야 제 맛이오. 허 그러고 보니 안주가 없어서 그러신 모양이구려. 사실 이런 절간에 안주가 어디 있겠소? 또한 안주없이 술을 즐길 때 주도십팔법(酒道十八法) 중 아홉 번째 경지에 오르게 되는 것이오. 하지만….”

갈수록 가관이다. 무림 최고의 성지라는 소림이 이런 절간 정도로 취급됐다. 거기다 주도십팔법이라니…. 실제로 주도십팔법이란 것이 있기는 한 것인가?

“시주가 워낙 술하고는 인연이 없다하니 안주는 안된다 해도 내 목숨을 걸고 슬쩍한…. 아니 집어온 월병(月餠) 하나 드리리다. 어라? 대추도 있네.”

그는 가사 소매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대추 몇 알과 월병을 싼 유지를 꺼내 담천의에게 내밀었다. 월병은 중추절의 대표적인 음식이다. 특히 명에 있어서의 월병은 각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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