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사금파리 부여잡고 52

남한산성-뱀 껍질 벗기기

등록 2005.04.07 17:01수정 2005.04.07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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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뱀 껍질 벗기기

“나 참! 이거 더러워서! 에이 육시럴! 오살할!”


성 밖에 나갈 채비를 한 장판수는 누가 듣건 말건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한기원과 시루떡도 그런 장판수를 바라보며 분을 참지 못했다.

“이 놈들이래 일부러 그런 것이야! 그 불알도 없는 내시놈이 얼찐거리는 걸 골려주었더니 결국에는 이렇게 되는구만!”

장판수에게 접근했던 내관은 어명이라고까지 하며 몰래 지시한 일을 이행하기는커녕, 그들과 가까이 지내자 가끔씩 근처를 돌아다니며 장판수에게 무언의 압박을 주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장판수는 며칠 전 한기원, 시루떡과 함께 그 내관을 골탕 먹일 계획을 세웠다.

“그 놈이래 내 주위에 나타나는 때가 정해져 있으니 바로 신호를 보내갔어.”

장판수는 내관이 나타나자 약속대로 호들갑스럽게 기침소리를 내었고 근처에 숨어있던 사람들이 내관이 도망 못 가도록 에워싼 후 그를 꽁꽁 묶어 버렸다.


“이게 무슨 짓인가! 난 상감마마를 모시는 몸일세!”

“알게 뭐야! 니가 장초관을 시켜 우리를 죽이려 했다면서?”


사람들은 내관을 뒷간의 똥통 속에 집어던진 후 가버렸고 내관은 한참 후에야 근처를 지나가던 병사들의 도움을 받아 나올 수 있었다.

“꼭 그 일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요즘 양반내들이 우리 군관들과 이를 따르는 병사들을 보는 눈이 곱지는 않았습니다.”

한기원의 말에 시루떡도 맞장구를 쳤다.

“맞소 맞소 얼마 전에 부장 김돈령이 병사들을 모아놓고 ‘너희들이 대체 누굴 모시는가’ 따져대다가 병사들이 무시하자 얼굴 붉혀 가버린 적 있었다오.”

특히 장판수는 경계의 대상이었고, 일부에게는 밖에 진치고 있는 청나라 군대보다 더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어찌되었건 이렇게 된 거 우리가 돕겠소이다.”

장판수는 그럴 필요가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전에 사람들을 내보낼 때는 싸움까지 벌이며 주의를 끌었지만 그것은 사정이 그만큼 긴박했기 때문이 아니네? 지금은 오랑캐들도 자주 싸움에 져 사기가 떨어졌을 테니 암문을 통해 샛길로 나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네만.”

장판수는 조금 전에 흥분하여 소리쳤던 감정을 가라앉히며 애써 자위했지만 한기원과 시루떡은 더욱 열을 올렸다.

“부당한 일을 시켰으니 모두 행궁으로 가 상소해야 하오!”

“거 그러지 말래도! 내래 이 일로 시끄러워지는 거 원하지 않아! 재빨리 다녀올 테니 마음 놓고 있으라우! 일이 잘 되어 원군을 끌고 오면 다 함께 좋은 일 아니갔어?”

장판수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후 새벽을 틈타 어영군의 호위 하에 암문으로 가게 되었다. 그 동안에 장판수의 머릿속은 오만가지 생각으로 가득 찼다.

‘이 자들이 암문으로 날 내어 보낸 후 화살을 쏘아 해치려는 것은 아닐까? 그게 아니면 오랑캐들에게 사전에 알린 것은 아닐까?’

장판수는 단지 최근의 일로만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장판수는 일전에 강화도로 가려던 왕의 행차를 되돌린 암살시도가 청나라 병사들이 저지른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암살자들이 쏜 화살은 보통 화살이 아닌 짧은 편전이었다. 그것은 곧 암살자들이 조선 사람이면서 무예에 조예가 있는 자들이라는 뜻도 되었다.

그럼에도 그 자리에 있었던 자들은 물론, 임금까지도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상으로 장판수에게 내린 곤룡포를 거둔 일도 괜히 일을 밖으로 알리고 싶지 않다는 왕의 뜻이 반영된 것임에 틀림없었다.

“잘 다녀오게나.”

병사들의 짤막한 전송이 있은 후 장판수의 염려와는 달리 암문을 나선 뒤에 누군가 공격을 가해오거나 앞에서 청의 병사들이 느닷없이 달려드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장판수는 굳게 부여잡고 있던 칼집에서 손을 뗀 후 크게 숨을 몰아쉬고서는 남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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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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