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마친 계화는 입을 꾹 다물고서는 장판수를 힐끗 쳐다보았다. 무엇인가 할 말이 있었지만 계화는 장판수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사실 혼란한 상황만 아니라면 도승지가 직접 이들을 대면해 계목을 적고 있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니만큼 계화에게는 놓칠 수 없는 기회이기도 했다.
"내래 또 할 말이 있습네다. 가는 길에 어느 역적 놈의 습격을 받았습네다."
장판수가 먼저 끼어들었고 도승지는 계목의 초안을 덮은 채 말했다.
"주상전하께 먼저 알리는 일이 급하니 그 얘기는 다른 자에게 말하시게."
도승지는 황급히 잰 걸음으로 가 버렸고 장판수는 욕을 하며 북문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이보라우. 왜 아직도 날 따라오네? 난 병영으로 가는 길이라우."
장판수는 그때까지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오는 계화가 은근히 거슬리기 시작했다. 이미 퉁명스러운 장판수의 태도에 익숙해진 계화가 지지 않고 쏘아붙였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궁에서 부르기 전까지는 갈 곳 없는 처자를 보호해 주는 것도 나라의 녹을 먹는 자의 일입니다."
"에미나이래 입만 살아가지고서리......"
장판수가 북문의 병영에 거의 다다랐을 때 시루떡과 몇몇 병사들이 허겁지겁 달려와 울음을 터트리며 그를 맞이했다.
"와들 이러네?"
"억울하게 다 죽었소! 그놈들이 일부러 그랬소!"
시루떡은 영의정 김류가 무모한 작전을 벌여 장판수와 함께 싸웠던 수많은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몬 사실과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한기원을 함부로 죽인 사실을 얘기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그런 다음에 김류는 패전한 사실을 축소하여 조정에 알렸고 이후로 성을 나가 싸우려는 시도도 없어졌다는 사실이었다.
"뭐 그런 놈이 다 있네! 수어사 나리께서는 잠자코 계셨나?"
"그게 총융사 이서 나리가 병환으로 돌아가신 후에는 경황이 없는 모양입니다."
"총융사께서 돌아가셨다고? 허허참!"
장판수는 분노와 허탈감으로 안절부절 못하며 한참을 서성거렸다. 시루떡 등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역시 아무런 방도를 찾지 못하는 장판수를 보며 더욱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맞아! 혹시 그 양반이라면 수를 낼 수 있을 지도 몰라!"
장판수가 기억해낸 사람은 유백증이었다. 첫 만남에서 유백증은 선전관과 다툼을 벌인 장판수에게 이렇게 말한 바가 있었다.
-난 유백증일세. 협수사의 직에 있으니 행여 앞으로 저런 일이 있으면 내게 말하시게나.
"당장 협수사 나으리를 찾아보라우. 이곳 북성에 있으니 그리 어렵지 않을 걸세."
침통해하던 시루떡은 그 말에 기운이 나는 듯 병사들과 함께 흩어졌고 곧 유백증이 있는 곳이 장판수에게 알려졌다.
"내래 협수사 나으리를 뵙고 오갔어. 그리고 이 처자가 갈 곳이 없다는 데 잘 좀 봐주라우."
장판수가 간 후 시루떡은 계화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보아하니 꽃다운 처자가 어이 이리 고생이오. 장작이나 충분하면 목간물이나 준비할텐데."
시루떡의 말에 병사들이 낄낄거리자 계화가 단박에 똑같은 풍월조로 쏘아붙였다.
"궁인을 희롱하면 어떤 일을 당하는지 몰라보고 수작이오?"
"궁인? 그렇다면 궁녀란 말이오?"
계화가 무수리였기에 단지 궁인이라고 답했을 뿐이었지만 그런 차이를 알리가 없는 병사들은 놀란 듯 웅성거리며 따로 거처를 마련하느라 작은 소란을 벌렸다.
"협수사 나으리! 기억 하실지 모르나 장초관이라 합네다!"
작은 방에서 먹을 갈고 있는 유백증은 난데없이 뛰어 들어온 장판수를 금세 알아보았다.
"기억하다마다. 그 후에 그대가 보여준 용맹으로 인해 더욱 잘 기억하고 있네. 헌데 무슨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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