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180회

등록 2005.05.11 07:47수정 2005.05.11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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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광계 부부가 죽어 있다는 사실은 뜻밖이었다. 아주 미세한 혈흔을 남기고 있지만 그들은 단 한순간에 목줄을 끊겨 죽은 것으로 보였다. 검일 수도 있고 날카로운 다른 병기일 수도 있었다.

"별 것 아니오. 소제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저들 부부를 요구했고, 섭노선배는 그것을 거절했소. 철혈보나 섭노선배가 금적수사 부부를 차지하려는 이유는 사실 너무나 뻔한 일이었소."


그의 태도는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섭장천과 마노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런 충격을 받았음에도 저런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그들도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젊은 나이에 저렇게 침착한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믿지 못할 일이었다.

"금적수사는 오룡번의 내용을 알고 있었고, 또한 철혈보 내부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 철혈보 측에서 본다면 절대 놔줄 수 없는 인물이었소. 한편으로는 섭노선배와 함께 다닌 기간이 적지 않다보니 이쪽에 대해서도 많은 비밀을 알게 되었고, 이제는 섭노선배 측에서도 양보해 줄 수 없는 존재가 되었소."

그의 말은 확실히 논리적이고 적절했다. 사실 이런 내용은 그가 일부러 지어낸 말은 아니었다. 주위 정황을 보면 당연히 추론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 이렇듯 민첩하게 임기응변으로 대응한다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결론은 한가지였소. 나는 약속을 지켜야했고, 섭노선배나 철혈보의 양보를 얻어내는 방법은 이것뿐이었소."

그래서 죽였다는 말이었다. 좌중은 모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풍철영 마저도 그의 말에 허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내심 불안했다. 단지 그런 연유로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오직 풍철영 뿐이었다.


육능풍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담천의의 태도나 말로 보아 지광계 부부를 죽인 사람이 자신임을 은근히 비추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담천의란 자를 잘못 파악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담천의가 지광계 부부를 죽였다면 그는 매우 냉정하고 잔혹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말도 되었다. 그렇다고 섭장천이 죽였을 리는 없었다. 또한 초라한 행색의 내력을 모르는 노인이 저들 부부를 죽일 이유가 있었을까?

"노부는 담공자의 약조 이행에 감사드리네. 앞으로 철혈보는 담공자가 원하는 일이 있다면 반드시 손을 빌려 줄 것을 약속하네."


육능풍은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의 약속은 철혈보의 약속임에는 틀림없었다. 지광계 부부를 죽였다고 따진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흔쾌히 받아들이는 것이 득이었다.

"개의치 아니하시니 다행이외다."

담천의는 다시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섭장천이 입을 열었다.

"자… 다들 앉으시게. 무슨 생각들을 가지고 왔는지는 아나 일단 대화를 한 뒤에 하고 싶은 일을 해도 늦지 않을 것이네."

섭장천은 역시 노회(老獪)했다. 주위에 자신을 노리는 적들에게 둘러 싸여 있으면서도 그는 전혀 위축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위엄을 버리지 않았다. 마치 한 마리의 호랑이가 늑대들에게 포위되어 있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그는 그럴 자격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미 지난 과거이지만 천하제일인의 영광을 가진 사람이었다. 제일이란 수식이 그의 이름 앞에 반드시 붙여졌던 사람이었다. 중원 최고의 검이었던 사람이었다.

"앉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오. 섭노선배는 송풍진인을 죽이고, 저 자로 하여금 청송자를 암습하도록 만들었으며, 그 이전에도 철혈보와 종남, 화산의 인물들까지 죽였소."

"자네가 내 아이들을 죽여 관에 넣어 보낸 것 역시 마찬가지지."

"더구나 무림의 공적인 시검사도를 은폐하기 위하여 산서성과 하남성 경계에 살고 있던 죄없는 사십육 명을 살해한 것도 아마 섭노선배의 수하들 짓일거요."

일심관주(一心館主) 제관흥(齊款興) 등 구파일방의 연락망이었던 인물들을 죽였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부인하지 않겠네. 인간은 스스로의 목표를 가지고 노력한다네. 그 목표를 이루는데 걸림돌이 된다면 제거하는 점에 있어서는 노부나 구파일방이나, 철혈보 역시 마찬가지겠지."

억지스러운 말이었지만 그 말에 떳떳할 사람이나 문파는 없었다. 정파(正派)라 해서 살인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실리를 챙기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명분을 만들고, 중론을 조성해서 그들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알리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그 대가를 어찌 치를 작정이시오?"

"노부 역시 무림인이네. 목숨 값은 목숨으로 갚는 것이지. 하지만 나중에 해결하기로 하세. 노부는 조용하게 이 자리를 뜨고 싶네. 물론 저 친구를 데리고 말일쎄."

그는 조국명의 옆구리에 끼여 있는 송풍진인을 가르켰다. 아무리 과거에 천하제일검이었다 하더라도 이토록 허황되게 자신 있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이런 말은 이곳에 있는 인물들을 너무 경시하는 말이었다.

"본 장주의 생각은 차치하고라도 이곳에 계신 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오. 또한 저 친구는 본 장의 식솔을 죽였소. 섭노선배의 말씀과 같이 목숨은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시오? 그것도 이 자리에서 당장…."

명백한 거절이었다. 섭장천의 얼굴에 알 수 없는 웃음이 떠올랐다.

"섭노선배는 지금 밖에 있는 일행을 믿는 것이오?"

풍철영은 섭장천의 태연한 태도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미치지 않은 다음에야 저런 태도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아무리 그가 무공이 고강하다해도 그는 이 자리를 절대 빠져 나갈 수 없었다. 헌데도 저런 여유를 보이는 것에는 반드시 뭔가가 있을 터였다.

"그들이 들어온다면 한번쯤 상대해 볼만하지 않을까? 하지만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노부는 이곳에서 드잡이하기 싫네. 자네는 노부 부탁을 들어줄 만 할 텐데…."

풍철영은 잠시 섭장천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분명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저런 태도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인 후 나직하게 물었다.

"이제 섭노선배가 가지고 있는 마지막 패가 무엇인지 보여줄 때가 되지 않았소?"

섭장천은 웃었다. 역시 풍철영은 상대할만한 인물이다.

"자네 아들… 풍범이라고 했던가?"

잠시 말끝을 흐리는 섭장천을 보며 풍철영은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하지만 속마음과는 달리 이내 평상시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겨우 내 자식 놈을 미끼로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아들 놈 때문에 섭노선배를 놓아 주었다고 한다면 세상이 이 풍모를 어떻게 생각하겠소?"

그의 태도는 단호했다. 설사 아들놈을 죽인다 해도 그들을 놔주지 않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사실 이곳 장주의 아들 문제라면 누구도 나설 입장은 못 된다. 하지만 그의 태도에 좌중은 내심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물론… 장주의 성품은 그렇게 사사로운 문제에 연연해 할 사람은 아니지. 하지만 풍범… 아니 아마 취(就)라고 하던가? 오른쪽 어깨 위에 점이 세 개 있던데,,"

그 말에 풍철영은 잠시 눈을 감았다. 이미 상대가 안 것이다. 그리고 왜 그토록 섭장천이 자신 있어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아이를 챙기지 못한 것은 자신의 잘못이었다. 자신이 몸을 빼낼 수 없었던 것이 화를 불렀다. 그 아이의 존재는 이곳 식솔들 중 일부를 제외하고는 알지 못했다. 헌데 섭장천이 파악한 것이다.

"자네 말대로 마지막 패는 천왕패이지. 어떻게 할 건가."

그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풍철영 뿐이었다. 확실히 섭장천의 패는 모든 것을 뒤엎을만한 위력을 가진 패였다. 풍철영은 이미 이번 거래에서 큰 손해를 입었음을 알았다. 그것은 회복할 수 없는 손해였다. 상대가 그 아이의 존재를 알았다면 이제 자신이 내보일 패는 없다.

"으… 음…."

풍철영이 신음을 흘렸다. 좌중은 그의 돌연한 태도에 의아해 했다. 처음 보였던 태도와 달라지자 그 안에 모종의 사연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연유를 말할 수 없는 풍철영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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