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역사소설> 흐르는 강 69

대원군 집정기 무장개화세력의 봉기, 그리고 다시 쓰는 조선의 역사!

등록 2005.05.15 22:30수정 2005.05.16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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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대인의 차인행수는 어디 있는가?"

개성 행수 서문길이 황당선을 향해 중국어로 소리쳤다.
어릴 때부터 역과를 준비한 권기범이 듣기엔 어색한 발음이었으나 의미를 알아듣기엔 무리가 없었다. 왜 서문길이 청국 상인과의 거래를 담당하는 행수가 되었는지 짐작이 갔다.


"황하 쪽에 급한 거래가 생겨 부득이 그쪽으로 갔다. 그래서 급한대로 내가 이 배를 몰고 나섰다. 왕 대인께서 당신을 서운치 않게 대접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나를 모르겠는가? 두어 차례 진 행수를 쫓아 당신과 거래한 적이 있다."

상판 험악한 변발의 선원들 사이로 말쑥한 비단옷의 사내가 소리쳤다.
서문길을 향해 던진 말이었으나 권기범이 먼저 알아들었다.

"저자는 기억에 없소?"

권기범이 서문길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글쎄요… 아, 그래요. 맞습니다. 진 행수와 동행하던 그 자가 맞습니다."


서문길이 간신히 기억을 되살렸다.

"그렇다면, 은자가 담긴 궤부터 보이라 이르시오."


권기범이 서문길에게 주문했다. 직접 나설 수도 있었지만 거래 창구를 단일화하고 서문길 쪽으로 저들의 이목을 집중 시키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서문길을 통하기로 했다.

서문길이 은자를 보여 달라 요구했다. 저 편에선 미리 은궤를 꺼내 놓았는지 즉시 궤 몇 짝을 들어 뚜껑을 열어 보였다.

"나머지는 선실에 있다. 홍삼을 보여 달라."

권기범 쪽에서도 짐바리 몇 개를 풀어 보였다.

"미리 기별한 대로 이 번엔 2000근을 가져왔다. 천은 20000냥은 준비되어 있는가?"

"무슨 소린가. 지난 번에도 근당 은자 60냥을 주었다. 그런데 이번에 조선 사행이 북경에 넘겼던 홍삼이 풀리면서 가격이 더 하락했다. 그러니 50냥 쳐 주겠다."
"무슨 소린가!"

십 여보 간격을 유지한 서로의 배 위에서 말이 오갔으나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냥 간다고 이르시오."

권기범에 서문길에게 귀띔했다.

"예…."

서문길이 염려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일단 대답은 했다.

"미안하다. 당신들이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우린 배를 돌리겠다."

서문길이 강하게 대응했다.

"뭐야? 이 정도면 후한 시세로 치는 거다. 좋다, 예전처럼 60냥 쳐 주겠다."

저쪽 배에서 비단 옷을 입을 사내가 인심 쓰듯 말했다.
서문길이 어쩌냔 표정을 권기범 쪽을 바라보았으나 권기범은 굳은 표정으로 머리를 가로 저었다.

"안 된다. 우리는 원래 우리가 거래했던 그 가격을 원한다. 당신들이 값을 내리기 이전의 상태로 말이다."

"좋아, 70 준다. 더 이상은 안 된다."

비단 옷의 사내가 손가락 일곱을 펼치며 말했다.

"어찌 할까요? 이 정도면 요 사이 받을 수 있는 시세의 최고가입니다."

서문길이 권기범에게 조용히 말했다.

"안 되오. 100을 쳐주기 이전엔 넘기지 마시오."

"하오나, 이번 거래가 결렬되면 곧 장마철입니다. 가을을 기약하고 기다려야 할진데, 보관도 그렇고, 그간의 노임도 그렇고…."

"글쎄 내 말대로 하시오. 정 안되면 개화군 장정들에게 한 뿌리씩 달여 먹여 기운이나 보강토록 할 터이오."

"장사란 게 고집만 부린다고 되는 게 아니올습니다. 잘 생각…."

서문길이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권기범이 눈빛이 매서웠다. 어차피 이번 출행의 주체는 권기범이니 그냥 따르면 될 터, 일이 어찌되든 책임은 권기범이 지는 것인데 무슨 말이 많은가하는 눈빛이었다.

"당신들의 생각이 그렇다면 거래하기 어렵다. 우린 100냥 이하로는 넘길 수가 없으니 가서 왕 대인과 상의하고 다시 오라."

서문길이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딱 부러지게 말했다.

"뭣이! 지금 우리를 우롱하는 것인가? 먼 바다를 힘들게 넘어와 위험을 무릅쓰고 조선의 해역까지 들어왔거늘, 그냥 돌아가라고? 왕 대인께서 그냥 계실 듯 싶은가!"

비단 옷의 사내가 삿대질을 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 옆의 몇 몇 선원들도 이를 아드득 갈며 난간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위협이었다. 결국 지난 번 거래도 이런 분위기 때문에 헐값에 홍삼을 넘긴 것이었지만 어쩐지 이번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장삿속으로 시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당장이라도 이쪽으로 달려들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였다. 이번 선원들이 죄다 낯선 까닭도 일부러 격한 자들을 추려 배에 실은 연유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거래에 응하심이…."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한 서문길에 권기범에게 권했다.
그러나 권기범의 입에서 떨어진 말은 다른 것이었다.

"선장! 돛을 올리게. 우린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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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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