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사금파리 부여잡고 76

남한산성 - 닭죽 한 그릇

등록 2005.05.19 16:59수정 2005.05.19 18:08
0
원고료로 응원
“저 오랑캐놈들이 또 쏘아대는구나! 이미 조정은 싸울 뜻을 잃어 항복을 한다고 하는데 왜들 저러는 것이냐!”

평소에 낙천적이었던 시루떡도 불만의 소리를 외쳐대었고 병사들은 낮게 엎드린 채 연실 거친 욕설을 내뱉어대었다. 성안의 양식이 다 되어 배까지 곪고 있는 그들에게 남은 것은 악밖에 없었다.


“저놈의 척화하자고 씨부렁거렸던 조정신하들을 모조리 묶어 보내면 오랑캐들도 물러가지 않겠어?”
“세자저하도 보내라고 했다던데.”

병사들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구석구석에 몸을 숨긴 채 포격이 끝나기만을 기다렸지만 장판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숫돌에 칼을 갈며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포탄이 작렬하는 소리와 함께 장판수의 가슴에는 한 겹씩 울분이 쌓이고 있었지만 그 울분을 어디로 내보내야 하는 것인지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또 해가 져야 저 놈들이 그만 쏘아대려나!”

성벽 아래에는 포탄에 맞아 부상을 입은 병사들이 간단한 치료만 받은 채 신음소리를 내며 누워 있었다. 포격은 정말 해가 져서야 그쳤고 병사들은 망신창이가 된 성벽에 기대어 형편없는 저녁을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장판수도 칼을 갈던 손을 멈추고 짠지에 굳은 잡곡밥덩이를 물도 없이 목구멍에 밀어 넣었다. 장판수는 문득 계화가 떠올랐다. 수수한 차람에 예쁜 곳이 없는 계화였지만 성으로 오는 도중에 잠시 생사고락을 같이 했다는 것 때문이었을까. 장판수는 전혀 엉뚱한 와중에 계화를 떠올리는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도 어이없어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장초관께서 웃는 일도 다 있다니 그때 그 처자라도 생각하시오?”

정곡을 찌르는 시루떡의 말에 장판수는 버럭 소리부터 지르고 말았다.


“무슨 넋 빠진 소리를 하네!”

마치 그 말이 신호라도 된 양, 성 저편에서 횃불을 앞세운 청나라 병사들이 북을 두드리고 괴성을 지르며 일제히 장판수가 있는 서성(西城)으로 돌진해 들어왔다.

“적의 공격이다! 모두 위치를 지켜라!”

연일 포를 쏘아대며 압박을 가해왔음에도 조선 조정의 항복논의가 길어지자 기다리다 못한 청 황제 홍타이지가 남한산성에 대한 총공격 명령을 내린 것이었고, 공격을 집중시킨 곳이 바로 서문이었다.

청의 보병들이 빗발치는 조선군의 화살과 총포사격을 뚫고서 사다리를 거치했고 칼을 든 병사들이 몸을 사리지 않고 성벽위에 기어 올라갔다. 장판수의 머리에 어릴 적 용골산성에서 겪었던 격전의 순간이 전광석화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서 돌을 가지고 오라우! 창수들은 뭐하네!“

성벽을 기어오르던 청병들의 머리위로 돌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고, 그들은 피범벅이 된 채 성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나마 거의 성벽위로 올라서기 직전의 병사들은 조선군의 창에 목이나 어깨가 꿰뚫려 버렸다. 이런 방비를 피해서 용케 성벽위로 기어 올라간 청의 병사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칼을 휘두르는 장판수를 맞이해 목숨을 내어주어야 했다.

“물러서지 말라! 적을 격퇴하라!”

수어사 이시백이 병사들을 독려하는 소리는 우렁차게 울려 퍼졌고, 점차 성에 기어오르는 청의 병사들보다 성벽에서 위치를 고수하며 활과 총포를 쏘아대는 조선군의 수가 점점 더 늘어갔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청의 병사들은 성벽을 등진 채 무기를 버리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뒤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용골대는 깃발을 들어 명령을 내렸다.

“성의 반대편을 쳐라!”

장판수는 횃불이 이동하는 방향을 지켜보더니 성벽을 내려 뛰어갔다.

“말을 준비하라우! 적이 동성으로 간다!”

뒤따라온 시루떡이 장판수를 만류했다.

“동성은 훈련대장이 지키는 곳이니 알아서 할 것인데 왜 이리 무리를 하는 것이오이까? 게다가 준비된 군마는 없소이다.”
“기럼 성문을 열고 적의 뒤를 쳐야 할 거 아니네?”

장판수가 소란을 피우는 순간 포승줄이 던져졌고 장판수는 꽁꽁 묶이고 말았다. 포승줄의 끝에는 김돈령이 퉁퉁 부은 얼굴로 부하들과 함께 장판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묶인 장판수 앞으로 다가간 김돈령은 먼저 주먹으로 장판수의 얼굴을 몇 대 후려쳐 전날의 분풀이를 해대었다.

“칼을 다오.”

김돈령은 칼을 잡으며 장판수에게 말했다.

“여기서 죽여 버리면 알게 뭔가. 오랑캐들과의 난전 중에 죽은 걸로 되겠지. 안 그런가?”
“부장, 아니 사과 나리! 그만 두시오!”

시루떡이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질렀지만 김돈령의 칼은 무자비하게 앞으로 내질러졌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2. 2 수능 도시락으로 미역국 싸 준 엄마입니다 수능 도시락으로 미역국 싸 준 엄마입니다
  3. 3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 경희대 시국선언문 화제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 경희대 시국선언문 화제
  4. 4 미국에 투자한 한국기업들 큰일 났다... 윤 정부, 또 망칠 건가 미국에 투자한 한국기업들 큰일 났다... 윤 정부, 또 망칠 건가
  5. 5 "10만4천원 결제 충분히 인식"... 김혜경 1심 '유죄' 벌금 150만원 "10만4천원 결제 충분히 인식"... 김혜경 1심 '유죄' 벌금 150만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