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사금파리 부여잡고 79

남한산성 - 개의 혀

등록 2005.05.24 17:04수정 2005.05.24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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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 개의 혀

“이보시오! 천천히 좀 갑시다!”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다시피 하는 장판수를 서흔남은 따라잡지 못해 숨을 헐떡이며 소리쳤다.

“지금 급한데 이러다가 철원까지 언제가려고 그러네? 따라 오려면 알아서 하라우!”

장판수는 퉁명스레 소리쳤고 서흔남은 속으로 욕을 곰씹으며 장판수를 쫓아갔다.

“문을 열라우! 내래 남한산성에서 왔다!”

잠조차 자지 않은 채 새벽녘에 철원까지 온 장판수와 서흔남은 미친 듯이 성문을 두드렸다. 성산산성의 군졸들은 횃불을 이리저리 비추며 장판수와 서흔남을 확인했고 문이 열리자마자 장판수는 미친 듯이 뛰어들어 평안감사를 찾았다.


“급한 일이네! 빨리 감사 나으리가 있는 곳으로 날 데려 가라우!”
“아직 감사께서는 기침하시지 않았습니다.”
“기럼 깨우라우! 어명을 받들고 온 몸이네!”

한참 동안 난리를 피우고서야 장판수는 홍명구를 마주할 수 있었다. 홍명구는 한눈에 장판수를 알아보았다.


“판수 자네가 여기까지 오다니!”

홍명구는 장판수의 두 손을 마주 잡으려 했지만 장판수는 반가운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내래 한 마디만 묻갔습네다. 모든 도의 병사들이 어찌 되었건 남한산성으로 오려 했는데 조정에서 항복을 고려하는 지금까지 평안도의 병사들은 왜 여기 있는 것입네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장판수의 말에 홍명구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홍명구에게는 당연히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성안의 병력과 비슷한 수준의 청의 병력이 성산산성을 둘러싸며 압박해오기도 했고, 연락조차 차단되어 협동 공격을 할 다른 도의 병력과 연계할 기회는 잡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도원수 김자점은 황해도에서의 패전을 이유로 더 이상 진군해 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이 모든 일을 장판수에게 설명해 주고 이해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피곤해 보이니 이만 가서 쉬게나.”

장판수는 홍명구의 실망스러운 대답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제가 피곤한건 감사 나으리가 알 바 아닙네다! 어서 대답을 주시든지 당장 병력을 휘몰아 남한산성으로 진군해 가시라우요! 한 시각이 급합네다!”

홍명구는 할 말을 잃었고 보다 못한 군관하나가 장판수를 꾸짖었다.

“감사 나으리에게 이 무슨 망발인가!”
“망발이라 했네? 나라가 바람 앞의 등불같이 위태로운데 산성에 들이박혀 있는 게 더 망발이지!”

듣다 못한 홍명구는 손을 내저으며 등을 돌린 채 한숨을 쉬었다. 마침 달려온 윤계남이 이 모습을 보고 반가운 마음보다는 괘씸한 생각이 앞서 달려 나가 장판수의 뺨을 후려쳤다.

“이, 이게 뭐래! 니래 날 쳤네?”

장판수가 칼을 뽑아들려 하자 서흔남이 뒤에서 끌어안으며 이를 말렸다.

“아이고! 이러시면 안 됩니다!”
“놓으라우! 내래 저 놈과 못 다한 승부가 있었다구!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모조리 다 베어 버릴 것을!”

악다구니를 쓰는 장판수와 얼떨결에 뺨을 때린 후 이를 멍하니 지켜만 보는 윤계남을 뒤에 둔 채 홍명구는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그대들은 가서 쉬어라. 내 서둘러 답을 주겠네.”

장판수는 몸부림을 쳐 서흔남을 떼어놓은 후 소리쳤다.

“어디 기다려 보갔습네다!”

병졸의 안내를 받아 안락한 방으로 들어간 서흔남은 순식간에 곪아 떨어졌고 장판수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홍명구는 침통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켰다. 윤계남은 아무 말 없이 홍명구를 지켜보았다.

“지금 당장 남한산성으로 간다. 병사들을 점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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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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