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사금파리 부여잡고 80

남한산성 - 개의 혀

등록 2005.05.26 17:01수정 2005.05.26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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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나으리!”

윤계남은 홍명구의 말을 확인하려는 듯 크게 소리쳤다. 홍명구는 천천히 일어나 윤계남을 지나쳐 가며 한 마디를 던질 뿐이었다.


“내가 자네들 보기 참 부끄러우이.”

홍명구의 명에 따라 성산산성의 평안도 병사들은 신속히 집결해 모였다. 평안병사 유림이 이 명령에 놀라 허겁지겁 홍명구를 찾아가 물었다.

“이 어인 일이오?”
“군사를 휘몰아 적도를 무찌르고 종묘사직을 구원하기 위함이오.”
“아니 되오. 여태껏 신중히 처신해 왔는데 조정이 항복할지 모르는 지금에 와서 왜 쓸데없이 병사들의 희생을 더하려 하시오?”

사실 홍명구가 출전을 할 뜻을 밝힌 바는 여러 번 있었으나 그때마다 유림은 이를 만류하곤 했고, 때를 맞추어 김자점이 증원 병력을 보내어 준다는 언질이 오가며 발목을 잡곤 한 바가 있었다.

“난 당신과 도원수를 이해할 수 없소. 비록 물증은 없으나 내 동태를 몰래 도원수에게 알려 출전을 방해하지 않았소?”


그 말에 유림은 펄쩍 뛰며 소리쳤다.

“그 무슨 말씀이시오! 절대 그렇지 않소이다! 도원수에게 이 사실을 알려 확인해 보시오!”


“내 반드시 이 싸움에 이겨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도원수를 벌하라는 상소를 올릴 것인 즉, 병사께서는 이 싸움으로 공을 세워 죄를 씻으시오!”

홍명구의 단호한 말에 유림은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시고 말았다. 성산산성이 한바탕 들썩거린 후 홍명구는 별장 장훈을 호령했다.

“옙!”
“자네는 기병 전원과 보군 일천팔 백 명을 이끌고 밤을 낮 삼아 산을 넘어 어가를 구해오라!”
“넵!”
“나머지 포수와 살수, 창수들은 나를 따라 금화로 진격하여 적진을 교란하여 돌파한다!”

겨우 3천명이 넘는 병력으로 적진을 돌파한다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짧은 휴식을 취한 장판수와 서흔남은 어느 사이엔가 나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장판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장판수의 눈이 홍명구와 똑바로 마주쳤고 홍명구는 주저 없이 장판수를 호령했다.

“초관 장판수는 앞으로 나오라!”

장판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우렁찬 대답과 함께 앞으로 뛰어나왔다.

“너는 종사관 윤계남과 함께 선봉을 맡으라!”
“바라던 바이옵네다!”

장판수는 앞에서 있는 윤계남의 두 손을 마주잡았다.

“방금 전의 일은 잊었네! 내래 자네와 같이 힘을 합쳐 싸우는 날을 맞아 하게 되는구만!”

윤계남도 자신의 의지를 말로서 확인시켜 주었다.

“나 역시 그러하이! 각오는 되었는가!”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드높은 사기를 떨쳐 보였다. 구석에 있던 서흔남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슬며시 뒤로 물러서서 모습을 감추었지만 아무도 이를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평안병사 유림은 착잡한 표정을 애써 감추었고 성산산성에서 쏟아져 나오는 조선병사들은 당당히 발걸음에 힘을 주어 가며 물결치듯 구비 길을 이어져 갔다. 멀리서 성산산성을 정탐하던 청나라 병사들은 재빨리 이 사실을 자신의 상관에게 알리기 위해 산기슭을 타고 뛰어갔고, 한 판 큰 싸움은 이제 그 때와 장소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보라우 계남이.”
“응?”
“우리가 죽으면 누가 우릴 기억할까?”

장판수 답지 않은 질문에 윤계남은 잠시 동안 가슴이 미어져 왔다.

“우리는 살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던가?”
“살기 위해…, 살기 위해 죽는다는 건 바보짓 같지 않네?”
“닥치라우.”

윤계남이 장판수를 흉내 내어 어색한 평안도 사투리로 대꾸했고 둘은 어색한 미소로 잠시 대화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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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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