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195회

등록 2005.06.01 07:50수정 2005.06.01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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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까지 말해주었나? 그 분은 비원의 원주이시고 왕야(王爺)이시네. 더 자세한 것은 알려고 하지 말게. 자네한테 좋을 일이 없네."

"그렇다면 담가장의 혈사는 누가 벌인 것이오?"


"모르네. 정말 몰라. 그것 때문에 그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지. 그것을 알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야."

"그렇다면 그를 노리고 있는 자들은?"

구효기는 탄식을 터트렸다.

"그것도 확실치 않아. 과거 담명 장군이 처했던 상황과 지금 그가 처한 상황 역시 다르지 않아. 이 상황에서는 모두 그가 죽었으면 하고 바라는 상황이지. 그리고 그냥 덮어두고 싶은게 모두 가지고 있는 마음일거야. 다만…."

구효기 역시 상황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 하기야 중원 최고의 지자(智者)라 알려진 그가 잘못 판단할리 없었다.


"그가 진정한 모습을 보이자 누군가 나선 것은 그들이 담가장의 혈사를 저지른 자들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지. 담가장의 혈사를 벌인 자들이 아니라면 그의 행보를 지켜보기는 하겠지만 그를 노리는 짓 따위를 할 이유가 없을 테니 말이야."

그렇다. 만약 흉수라면 급하게 된 것이다. 그가 신검산장을 아무도 몰래 빠져 나갔음은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이겠다는 의미로 해석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자신들이 나설 필요없이 다른 곳과의 갈등만 깊어지게 만들면 되었다.


"개봉에 가 봐야 할 것 같구려."
"가 주겠나?"

"나야 아버님 때문이라도 구숙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일 아니오?"
"고맙네."

"구숙께 고맙다는 말은 처음 들은 것 같소."
"일행들에게도 떠날 준비를 시키게. 준비 되는대로 떠나세."

구양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일행이라 보았자 광도와 인규, 혜청 셋 뿐이오. 언제라도 떠날 수 있소."

이미 남궁산산과, 팽악, 그리고 모용수는 집으로 돌아갔다. 원단(元旦)이 얼마 남지 않았다. 무림세가의 자식이라면 이런 시기에 밖으로 떠돌지 않는다. 걸어 나가는 구양휘를 보며 구효기가 나직하게 불렀다.

"휘…!"
"…?"

"비록 부친과 의형제지간일지라도 자네는 노부를 숙부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이 노인네가 갑자기 심각한 어조로 이것을 묻는 이유가 뭔지 구양휘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끄떡였다. 재차 구효기가 물었다.

"자네는 담공자를 형제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계속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그렇소. 그가 나를 형제라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구효기는 미소를 지었다. 확인해 보고 싶었을 뿐이다.

"서두르세."

눈오는 때에 눈이 쌓인 관도를 달리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
흔적은 미세하나마 이어지고 있었다. 추적술을 가르쳐준 천교두를 만나게 된다면 그에게 고맙다는 말이라도 해주겠다고 생각했다. 흑의인은 자신의 검에 베어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아무리 지혈했다고는 하나 움직인 발자국과 선연한 핏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폭설로 인하여 그 자국은 희미해졌지만 그는 쌓인 눈을 살짝 치워내며 확인하고 있었다.

상대의 흔적은 좁은 협곡으로 이어졌다. 바람이 잦아들어 오히려 흔적을 찾기에 수월했다. 그러다 문득 그는 또 하나의 흔적을 발견했다. 그 역시 부상당한 것으로 보였다. 왼쪽 발자국 보다 오른쪽 발자국이 깊게 찍힌 것으로 보아 어쩌면 용화사 천왕문에서 자신에게 오른쪽 어깨를 뭉턱 베이고 도망간 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개 오른쪽 족적이 깊게 찍히는 경우는 왼쪽 다리가 부상당했거나 오른쪽 상체를 다친 경우가 그러했다. 왜냐하면 상체는 다친 쪽으로 기울게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두개의 흔적은 한곳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

바위를 끼고돌자, 은밀하게 모습을 나타내는 공간이 있었다. 만약 눈이 와서 천지가 백색으로 물들지 않았다면 그 틈에 동굴의 입구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을지 몰랐다. 그의 몸이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어느 순간에 보이지 않는 칼날이 자신을 노릴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동굴로 유인하는 것일까?)

그런다 해도 그는 들어가야 했다. 상대가 나오길 기다릴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는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럽게 동굴 속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의 청각은 최대한 열려 있었다. 동굴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짙은 피 내음이 맡아졌다.

부상당한 자가 있다는 증거였다. 그들일 것이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숨을 쉬고 있다면 분명 기척이 있을 터인데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더구나 동굴은 그리 깊지 않았다. 들어 갈수록 피비린내가 짙어졌지만 오장 정도를 나아가자 그 끝이 보였다.

그리고 더 이상 사람의 몸으로는 들어 갈 수 없는 곳까지 가자 갈라진 동굴 틈에 두 구의 시신이 끼어 있었다. 바닥은 물이 홍건 했고, 급격하게 기어 들어갈 정도로 낮아진 동굴은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모르지만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다. 물이 질퍽한 그곳에 두 구의 시체는 머리를 물에 박고 죽어 있었던 것이다.

상처로 보아 자신이 추적해 온 흑의인이 분명했고, 또 한 구의 시체 역시 천왕문에서 자신을 기습했던 자였다. 하지만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다.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도 없지만 이미 시신 두 구의 머리는 둔탁한 둔기에 맞은 듯 짓뭉개져 있었다.

(왜… 누가…?)

그들은 왜 여기에 왔으며 누가 죽인 것일까? 그러다 문득 그는 갑자기 동굴 밖을 향해 무섭게 치달리기 시작했다.

(함정…!)

이들은 일행이다. 이들을 죽일 자는 그들 일행 밖에 없다. 부상당한 이들을 데리고 추적해 온 그를 따돌리기 쉽지 않다고 생각하자 이들을 죽인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들을 죽인 자가 있다면 분명 함정을 파놓았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도 일단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었다.

쿠--쿵---쾅--!

바닥에 진동이 오면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굴이 무섭게 진동을 일으키며 천정에서 돌덩이와 흙먼지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화약이었다. 그는 동굴 입구가 보이자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쾅----!

다시 한번 폭발음이 일며 돌덩이들이 쏘아 나가는 그의 몸을 무수히 난타했다. 조금만 지체했더라면 동굴이 무너져 내리고 그가 아무리 고절한 무공을 가지고 있다 해도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함정이라고 판단한 그 순간에 무조건 밖으로 향한 그의 선택은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우---욱---!"

폭발의 충격은 그의 몸을 강타했고, 그는 입구를 빠져 나가며 허공에 선혈을 뿜었다. 정신이 아찔해 왔다. 그의 몸이 아래로 떨어져 굴렀다. 아득해오는 정신을 붙잡으면서 그는 빠르게 신형을 일으켰다. 혹시나 저 동굴 속에 있는 자들을 죽인 그들 일행이 아직 남아있다고 생각한 자기보호를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아주 현명한 행동이라 보였지만 그것은 그의 실수였다. 좀 더 깊이 생각했다면 그는 두 명의 흑의인이 죽어 있어야 한 이유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 같이 일을 도모한 자가 동료를 살해했다는 것은 입막음 외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미 그를 노린 이 일련의 행위가 이것으로 일단 막을 내렸음을 의미한다. 다시 또 시도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번 기회는 사라졌고, 일단 끝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가 만약 큰 부상이나 결정적인 충격을 받은 것처럼 누워있었다면 아마 누군가가 그를 노리고 왔을지 모를 일이었고, 그것은 아직 그가 끈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가 사라지고 얼마 후에 동굴 입구로부터 십여장 떨어진 언덕 위에 한 인물이 나타난 것은 그것을 입증하는 일이었다.

"운이 좋은 자로군."

더 이상 담천의를 쫓을 생각을 접은 그는 주름살이 가득한 노인으로 보였지만, 얼굴에 그어진 두 줄기 검흔으로 인해 더 나이를 추측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날렵하고 강인하게 보였고, 그의 눈은 노인의 눈답지 않게 날카로움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화약을 폭발시키는데 이용한 가느다란 명주실이 들려 있었다.
(제 49 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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