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207회

등록 2005.06.24 08:20수정 2005.06.24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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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3 장 천형(天刑)

분위기는 싸늘하게 변했다. 그의 말에 몽화는 물론 주위에 앉아있던 네 명의 여인들의 얼굴에 경악스런 표정과 함께 미세한 살기가 스쳤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과 선택의 기로에 선 듯한 갈등이 역력했다.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린 담천의를 바라보는 몽화의 눈에는 더욱 격렬한 변화가 일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급속히 표정을 가라 앉혔다. 그녀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정신을 차린 듯 앵두 같은 입술을 열었다.

"정말 놀라운 일이군요. 어떻게 알았나요?"

놀라웠다. 그녀의 말은 담천의의 말을 인정하는 의미였다. 담천의는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의 대답은 유곡이 아니라면 하지 못할 말이었기 때문이오."

그의 말에 몽화는 왜 이곳에 와서 무례하기까지 한 태도를 보였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사내는 자신에게 이상한 점을 발견했을 것이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자신이 반응을 되도록 크게 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질문 역시 천지회의 회주가 아니라면 대답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 모든 것으로 확인한 것이다.


그녀는 이 사내의 세심함과 놀라운 관찰력에 감탄했다. 아무도 자신의 모습에 대해 알아보지 못했다. 자신의 변화에 대해서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들조차 감탄할 정도였다. 아마 갈유라도 유심히 살피지 않는다면 그녀의 모습을 보아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헌데 이 사내는 알아낸 것이다.

"우리는 두 번 만났어요. 헌데 당신은 정말 놀랍군요."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 미세한 살기가 또 다시 스쳐 지나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는 갈등하고 있었다. 이곳은 천지회의 한 부분이다. 아무리 담천의가 강하다 해도 죽이지 못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일단 마음을 접었다.

"그리 놀라울 것은 없소. 처음 다관에서 당신을 만났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소. 당신이 아무리 천지회에서 높은 위치에 있다고는 하나 추혼귀견수 하공량과 같은 인물을 부릴 수 있는 지위는 회주 정도가 아니라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소. 헌데 이번 역시 그가 나를 데려왔소."

담천의의 태도는 매우 신중했다. 이것은 필요하지 않다면 꼭 설명해 줄 필요가 없고, 사실 말한다는 자체도 꺼려지는 일이다. 상대가 굳이 피하고자 하거나 감추고 싶은 일을 끄집어내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작정을 했는지 말을 이었다.

"또한 당신의 목소리는 자연스럽지 못했소. 당신과 같은 미녀의 목소리가 탁하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오. 목을 다친 적이 있다거나 어렸을 적 목을 못 쓰게 한 경험이 있을 때 그렇게 변할 것이오."

"목소리만으로?"

"당신의 목을 살펴보았소. 하지만 당신은 전에도 그랬고, 지금 역시 속에 턱까지 올라오는 화복(華服)을 입고 있어 사내의 특징이랄 수 있는 결후(結喉: 목울대, 喉結)를 확인 할 수 없었소. 당신의 코밑이나 턱을 보았지만 수염을 깎은 흔적은 진한 화장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발견할 수 없었소."

"하면…?"

"사람은 어릴 적부터 사내는 사내로서, 여아는 여아로 자라게 되어 있소. 그리고 어릴 적 배운 그러한 무의식적인 행동은 바꾸기 매우 어렵소. 예를 들어 사과를 던져주면 사내아이는 그것을 손으로 받으려하오. 하지만 여아라면 몸을 낮추며 치마를 펼쳐 받거나 안으려는 행동을 하오."

몽화는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그에게 그런 행동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그런 행동은 사실 너무나 많았다. 차를 마실 때에도 젓가락질을 하면서도 나타날 수 있었다. 걸음걸이에서도 나타날 수 있었고, 웃는 모습에서도 그러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만 세심한 관찰력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사소함까지도 놓치지 않는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당신의 어투였소. 어투와 억양은 기이하게도 어릴 적 배운 기억을 쉽게 잊지 못하는 모양이오. 사내아이는 사내아이대로, 여아는 여아대로 사용하는 어투와 억양이 약간 다르기 때문이오."

그녀는 감탄했다. 아니 그는 너무나 감탄했다. 그런 것은 아무리 바꾸려 해도 바뀔 수 없는 것이다. 세월이 가면서 조금씩 변해 가겠지만 그 흔적은 언제나 남게 되는 것이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머리에 꽂힌 영롱한 주화가 마치 항변하듯 짤랑거렸다.

확실히 세심한 관찰력을 가진 자다. 처음 만났을 때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번째 만난 이 자리에서 느낀 그는 너무나 위험한 자라고 생각했다. 왜 비원에서 그리도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단지 이 사내의 신분 때문에 집착하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반드시 그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내가 몽화로 당신을 상대하는 것이 좋은가요? 아니면 유곡으로 만나야 할까요?"

그녀가 아니 그가 아직 여자 말투로 말하고 있는 것은 몽화이길 바라는 것일 게다. 그가 왜 여장을 하고 여자로 변해야 했는지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녀가 바라는 대로 하는 것이 도리였다.

"나는 그래도 울금향이 좋소."

그의 말에 그녀는 다시 배시시 웃었다. 그녀의 미소는 너무나 황홀하여 누가 뭐래도 여자라고 생각하게 했다.

"천형(天刑)이예요. 갈대인께서 봐주신지 이십년이 넘었지만 고칠 수 없었지요. 단지 변화를 늦출 뿐이었어요. 그러다 문득 하늘의 뜻이라면 따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어요. 관직에서 스스로 물러난 것은 그 때문이에요."

단지 몇 마디뿐이었지만 그녀는 그녀가 이십여 년 동안 가져왔던 아픔을 표현했다. 하늘이 내린 기재에게 또 다른 형벌을 가한 것은 어쩌면 공평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그녀가 느낀 갈등과 고통이 얼마나 컸으랴!

어느 때부터인가 가슴이 부풀어 오르고 피부는 여인의 그것처럼 변해갔다. 남성으로의 특징은 조금씩 사라지고 여성화되기 시작했다. 당황했지만 문제는 그녀 자신이었다. 그녀의 정신은 이미 여성화되어 있었고, 여장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동여매고 억지로 목소리를 굵게 내려고 노력했다. 목숨을 끊을까도 생각했다. 명의라는 갈유의 치료는 일시적인 효과는 있었지만 단지 그 변화를 지연시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그녀는 자신이 여자이고, 완전한 여자가 되길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은 아무리 겸손한 척을 한다 해도 오만을 벗어던지지 못한다. 언제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만족할 수 없는 존재이니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그리 어렵거나 괴로운 것이 아닐진대도 사람은 언제나 자신에 국한해서 생각한다. 자신만의 어려움이라고 생각한다. 하늘이 부여한 삶에 순응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너무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아픔이 있소. 그 형태나 빛깔이 아주 다를지라도 그 스스로 느끼는 고통은 매우 클 것이오. 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남의 아픔을 이해하려 들지 않고 단지 자신의 고통만을 호소하는 버릇이 있소."

담천의는 웃었다. 그 태도와 모습은 몽화를 기형적인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닌 아픔 그대로를 보겠다는 의미였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 보아주는 것이 남의 고통을 이해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다. 몽화 역시 화사하게 웃었다.

"남을 이해하는 일은 그리 쉬운 게 아니에요. 그런 점에서 당신은 확실히 여자로 하여금 넋을 잃게 만드는 매력이 있음을 인정하게 만드는군요. 송소저가 왜 당신에게 빠졌는지 이해할 수 있어요."

"이제 우리는 솔직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구려."

몽화는 웃었다. 그녀를 진심으로 감탄하게 만들 사람은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앞에 있는 사내 역시 그 중의 하나였다. 인정하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그렇군요. 좋아요. 우리는 이제 서로를 조금씩 알게 되었군요."

두 사람은 마주보며 웃었다. 이제는 서로 탐색하며 우회적인 질문을 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결국 담가장의…."

"아직 알아내지 못했소. 그 끈이 강중장군이었지만 누군가가 내가 도착하기 전 그 분을 살해했소. 또한 나를 기습했던 자들도 모두 죽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끈을 놓치게 된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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