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역사소설> 흐르는 강 117

대원군 집정기 무장개화세력의 봉기, 그리고 다시 쓰는 조선의 역사!

등록 2005.08.10 13:07수정 2005.08.12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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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꽤 식견이 있어 보이는 후보생 하나가 일어났다.

“효과적인 조직을 갖추지 못한 채 병력수만 많은 것은 장점이 될 수 없습니다. 군사의 훈련과 동원, 배치, 물자의 공급 문제가 필연코 발목을 잡게 될 것이니 반드시 이에 대한 대비가 있어야 할 겝니다. 하여 그 어느 때 보다도 효율적인 참모조직이 필요한 때로 가고 있는 것이고요.


지금 우리 처지는 유럽처럼 몇십 만이나 백 만이 넘는 대규모 군이 아니고 철도를 이용한 군사의 전략적 분산이 가능한 처지는 아니더라도 필요에 따라 쪼갤 수 있는 제대(諸隊)로 나누는 것이 이번 편성의 요추입니다.

어차피 우리 개화군에서 쓰는 신식 보총이라면 전장에서 전술적 분산이 필수일 터이고, 그리되면 더 넓은 전장에서의 지휘와 통솔의 조직화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이번 편성은 앞으로의 전장상황에 딱 맞는 개편이 될 것입니다.”

애초 졸려고 마음먹고 눈을 감았던 점백이가 지그시 눈을 떴다. 말을 마친 사람을 보니 본영에서 들어온 자로 이미 초관 직책에 있던 이였다. 그러니 이번 무관학교를 마치면 참령이나 부령 계급을 달고 참모로 임관하는 게 정해진 수순일 터였다.

‘입만큼이나 몸도 빠르다면 더할 나위 없겠구먼.’

점백이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다시 눈을 감았다. 성도 갖지 못한 불상놈으로 태어나 중대장이란 직책까지 맡게 된 것은 황송한 노릇이었지만 흑호대의 임치수 대장과 함께 금위영시절부터 함께 했던 세월을 생각하면 당연한 보상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생사의 경계를 오가며 수년 세월을 몸으로 때운 자신과 비하면 저 치는 사대부 가문의 먹물이라는 이유로 애초부터 좋은 줄을 타 이 자리에까지 오른 자일 터였다.


‘평생 농사가 뭔지 노동이 뭔지 모르는 샌님도 병서를 읽고 글줄만 꿰면 고위 장교로 굴러먹으니… 이래저래 썩을 놈의 세상. 참 대동세상이란 게 있기는 있냐 말여.’

눈을 감고서도 자꾸 못마땅한 생각이 들어 언짢았다.


“군지휘관들은 최고 지휘자의 광범위한 계획을 숙지하고 전반적 행동방침을 전달받은 채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세부 작전행동에서 행동의 자유가 주어지고 기선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대대장급 지휘관은 최소한 중대장급 지휘관에게 전장에서의 모든 권한을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말은 중대장급 이상의 지휘관은 대대장을 대신하여 현장의 정황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다니엘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 말이라면 최소한 우리 흑호대와는 거리가 먼 이야긴 것 같은데…. 우린 대대급 이상으로 떼지어 다닐 일이 없잖수. 어차피 중대라 봐야 서른 명 뿐이고 오장이나 소대장 단위로 흩어져 움직일 터이니.”

더 듣기가 역겨웠던지 점백이가 퉁명스레 말을 꺼냈다. 다니엘은 웨스트포인트라는 미리견의 무관학교를 나온 자라 했다. 조선에 들어올 무렵 계급이 ‘캡틴’이라 하였기로 편의상 ‘정위’라 부르고 있는 터였다. 그러니 벌써 몇 년 째 정위인 다니엘과 계급만 가지고 우위를 따지기도 뭐하고, 이방인이라고 말을 함부로 하기도 뭐해서 높임도 낮춤도 아닌 채 점백이의 말이 어정쩡했다.

“그럴수록, 부대의 편제가 잘게 쪼개어질수록 지휘체계의 확립과 현장 지휘관의 재량권을 십분 인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하급지휘관들과 전술목적을 구체적으로 공유해야 할 것이오.”

점백이의 불손한 태도를 개의치 않는 듯 다니엘이 담담히 말했다.

“저는 노상 다니월(茶尼月) 정위님이 궁금했수다. 장교라면 미리견에서도 나름대로 살만한 처지였을 터인데 무엇이 아쉬워 예서 이러고 있는 겐지….”

“당신들과 같은 이유요. 윤서 홍이나 제너럴 권 같은 이유. 품은 뜻은 있으나 그 뜻을 펴지 못할 때 부득이 자신의 조국에 머물 수 없는 상황이 되기도 하지 않소. 나는 군인이오. 그러나 연방의 유지를 위해서든, 연방의 해체를 위해서든 함께 그 땅을 세웠던 내 동족들끼리 피 뿌리는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소.”

“그럼 우리는 같은 동족끼리 피 흘리는 상황이 아니어서 그걸 부추기는 거요?”

점백이가 상대방의 기분은 아랑곳 없이 자기말을 내뱉었다.

“…내전은 장기화되지 않을 것이오. 최소한의 희생으로 여러분의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솔직히 윤서 홍의 청에 따라 이곳에 발을 딛을 땐 도피처라는 것, 그리고 내 밥벌이라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었소. 조선인에 대해 특별한 기대도 없었고. 하지만 조련이 끝날 때마다, 해가 거듭될 때마다 조선인의 무서운 저력을 발견합니다. 어떤 환경을 만들어주느냐에 따라 누가 이끌어주느냐에 달린 것이지 조선인 자체의 내재된 무능과 악이 지금 쇠약하고 허덕이는 이 나라를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오. 난 이 나라의 가능성을 믿습니다.”

“끝까지 싸움이 무서워 도망 온 것이라는 이야기는 안 하시는구먼요.”

다니엘의 정중한 말에도 여전히 점백이가 빈정댔다.

“이봐, 노랭이! 너 카이삿키(개새끼)!”

듣다 못한 레이먼이 삿대질을 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 왜 너희 지저분한 여키 있는 출 알아? 다 캡틴 다니엘 태문이야! 크 푼은 너 카튼 노랭이에게 크런 소리 들을 푼이 아니야! 남쿤 봉쇄선을 뚫고 나올 때도 늘 선봉에 섰던 푼이야. 다른 퀴족 놈들 달라. 부하 아끼지 않아. 벗 캡틴 다니엘 달라. 나 레이먼 목숨 없어도 그 푼 따라. 절대로 네 놈 노랑이 캡틴 다니엘 욕하지 마!”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조선말로 격앙되게 내뱉었다. 다니엘과는 다르게 어눌한 발음이었지만 대강의 의미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다니엘이 영어로 레이먼을 제지했다.

“…….”

점백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양인들이 맘에 차는 것은 아니나 달랑 둘 뿐인 그들이 그렇게까지 서로를 위한다는데 굳이 폄하하고 싶지는 않았다. 점백이가 자리에 앉아 팔짱을 끼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무엇을 위해야 하는지, 자신이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저들은 무엇인지, 개화군은 다 무엇인지, 그간 한 길만 바라며 걸었던 모든 것들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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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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