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에 활용하기 위해 대학노트에 해놓은 메모.조성일
"사람들은 '과학'의 '과'자만 얘기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하물며 과학에 관한 글은 더더욱 '멀리해야 할' 대상이지요. 우리의 삶 모두가 과학으로 설명되어지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원숭이도 읽을 만큼 쉽게 생물학을 설명해보자는 의미에서 시작했죠."
그의 글발이 한 글발 한다는 것은 새삼 설명이 필요 없다. 말하듯 쓰인 그의 글은 그냥 술술 읽히면서 때로는 배시시 웃음을 머금게 하고, 때로는 '바로 그거구나' 하고 맞장구를 치게 한다.
그의 글은 단순히 생물의 다양한 살이를 재미있게 설명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물의 살이를 씨줄로, 인간의 삶을 날줄로 하되 자신의 경험과 해학의 물감들을 곁들여 직조된 피륙이기에 형형색색의 무늬가 들어가 있다. 조개류를 설명하다 분위기가 딱딱하다 싶으면 "아, 군침이 도는구나!"하는 표현을 집어넣고, 또 때로는 공자말씀까지도 동원한다.
한번 읽기 시작하면 읽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묘한 글재주가 그에게 있다. 그런 그는 자신의 글 '사람과 소나무'가 중학교 2학년 1학기 국어교과서에 실리자 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스승인 '물고기 박사' 최기철 교수에게 제일 먼저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최 박사의 글 '홍도 기행'이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는 것을 보고 무척 부러웠기 때문이다.
주위에서 국어 선생으로 착각 아닌 착각을 할 정도로 그의 글이 깔끔하고도 정갈한 것은 원래 글재주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의 남다른 공력의 덕분이다.
그는 지금껏 그 두꺼운 <이희승국어대사전>을 두 권 째 말아먹고(?) 있었고, 자신의 말글살이 노트인 '눈을 끄는 단어 및 문장 노트'를 만들어 틈틈이 좋은 말글을 메모했다가 글쓸 때 활용한다. 속담 사전 역시 좋은 글쓰기를 도와주는 빼놓을 수 없는 그의 글 친구이다.
젊을 때는 진보주의자, 지금은 보수주의자
"달팽이요? 부동산 투기를 하지 않습니다. 또 잔꾀를 부리지 않습니다. 보세요. 언제나 제 집을 등에 짊어지고 다니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지 않습니까."
| | | 권오길 교수는 누구인가 | | | | 경남 산청에서 태어난 그는 네 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당시 일본에 유학하여 지리학을 전공하던 그의 아버지는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끌려갔다가 사망했다. 한국인 아버지가 일본군인이 되어 미군의 총에 맞아 죽었지만 원망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포기했다가 친척의 도움으로 중학교에 들어간 그는 진주고, 서울사대 생물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한다. 수도여고, 경기고, 서울사대부고에서 교편을 잡던 그는 1980년대 들어 강원대 생물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겨 오늘에 이르렀다.
<강원일보>에 10년 넘게 ‘생물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는 그는 신문과 방송, 책을 통해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2000년 강원도문화상을 비롯 2002년 간행물윤리위원회 저작상, 2003년 대한민국과학문화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는 이번에 정년퇴임 기념 헌정 전집으로 묶인 책 이외에도 베스트셀러인 <인체기행> <달팽이> <개눈과 틀니> 등이 있다. / 조성일 기자 | | | | |
달팽이 박사의 입에서는 달팽이에 대한 찬사가 마르지 않는다. "옛날 사람들은 달팽이를 '와우(蝸牛)'라고 했는데, '와'는 달팽이, '우'는 소라는 뜻으로 역시 행동이 소처럼 느릿하고 굼뜨다는 의미가 들어있다"며 권오길 교수는 "'우보호시(牛步虎視), 뚜벅뚜벅 느린 소걸음을 걸어도 눈은 형형(炯炯)히 빛나는 범을 닮아야 한다', '실패의 반은 게으름에 있다'는 말을 되새기며 느리지만 꾸준한 달팽이를 닮아보라"고 권유한다.
어느덧 그의 생물학 이야기는 일본원숭이를 예로 들어가며 진보와 보수에 대한 것으로 이어진다.
"고구마와 옥수수에 묻은 모래를 제거하고 먹는 방법(바닷물에 씻어 먹는 방법)을 터득하는 순서를 보면 새끼 암놈이 가장 빨리, 다음이 새끼 수놈, 그 다음이 어미 암놈이 받아들이고, 아비 수놈은 여전히 고고 창창 고구마는 벗겨 먹고 옥수수는 한 알 한 알 주워 먹습니다. 사람으로 치면 초보수주의자인 할아버지나 보수적인 아버지의 행동에 비해 젊은이들이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잘사는 사람들이 무조건 미웠고, 군사정권에 저항하기 위해 머리를 기르기도 했고, 식당에서 쓰는 냅킨에 서명을 하여 시국선언을 할 만큼 한때는 진보주의자였던 자신이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인지 보수주의자가 되었다며 헛헛한 웃음을 웃는다.
"앞물은 뒷물에 밀리고 뒷물은 다시 그 뒷물에 밀리듯이 보수와 진보는 역사 속에서 항상 공존하면서 자리바꿈을 해오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를 생애 최고의 날로 살아간다'
그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자 나무하던 지게를 부수기도 했다. 고등학교 성적표를 들고 형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다가 형이 "다른 과목은 몰라도 전 학년 모두 '수'를 받았던 과목이 바로 생물이라며 생물을 전공하면 어떻겠느냐"고 해서 당시 학비를 내지 않던 서울사대에 들어간 그는 영락없이 자신의 몸에는 생물의 피가 흐른다고 말한다.
그가 달팽이 박사가 된 것은 패류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던 대학원 시절인 197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연히 보게 된 미국 과학잡지
에서 눈에 확 띄는 사진 한 장을 발견한다.
"잡지 한 면을 전체에 실렸는데, 달팽이 사진이었어요. 순간 '아, 저거다!'하는 탄식이 나오더군요. 그 사진의 오늘의 나를 만들었습니다."
최신호를 보여주는 권오길 교수는 비상용으로 결혼반지를 꼭 끼고, 간첩으로 오해를 받아가며 전국의 산과 바다, 들에서 생물채집하며 달팽이를 비롯한 연체동물에 관한 논문 80여 편을 써낼 정도로 이 분야의 권위자가 된다.
요즘 잘나가는 과학에세이 필자인 서울대 최재천 교수도 한 수 가르침을 받고 싶어 하는 권오길 교수는 그의 뒤를 이어 과학 대중화를 위한 글쓰기에 나서는 후학들이 나오고 있어 반갑다고 했다.
슬하에 둔 두 딸과 아들이 모두 생물을 전공하고 있다는 그는 지금까지의 작업을 계속하기 위해 학교 근처에 조그만 아파트를 하나 빌려 연구실로 쓸 계획이다.
"글쓰기란 피를 잉크로 만드는 일 같습니다. 여전히 어려워요. 하지만 지금까지 해온 것보다 더 많이 쓸 겁니다. 달팽이에 대해서는 쓸 만큼 썼으니 이젠 지렁이나 두더지 같은 땅 속 생물에 대해 써볼 참입니다."
담배를 참지 못해(그는 담배는 끊는 것이 아니라 참는 것이라고 했다) 가끔 한 대씩 물게 된다는 권오길 교수는 "건강하세요!"라는 말로 독자들에게 마무리 인사를 했다.
'지족최상(知足最上·만족을 알면 그 이상이 없다)'을 좌우명으로 삼는 권오길 교수. '오늘 하루를 생애 최고의 날로 살아간다'는 스승 최기철 교수의 말씀을 새기며 퇴임 이후를 준비하느라 그는 한여름의 무더위를 잊고 있었다.
꿈꾸는 달팽이 - 과학 속에서 삶의 진리 깨우치는 권오길 교수의 생물학 강의
권오길 지음,
지성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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