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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 김병학의 사저.
뉘엿한 해가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김병학의 사랑 댓돌에 신이 여러 벌 놓여 있었다. 김병학이 침침한 방안에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훑었다. 친동생 김병국과 사촌동생 김병기, 조대비의 친정 조카인 조성하와 조영하. 대원군의 서슬에 예전 같지 않게 위축되긴 하였으나, 한 때 떠르르했던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세도가를 이끄는 핵심인물들이었다.
“올 여름, 조정의 인사가 어수선합니다 그려.”
직급으로 나이로나 가장 상좌인 김병학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도 형님은 굳건히 영의정 자리에 눌러 계시니 좋으시겠습니다.”
지난 해 경복궁 중건 현장 화재 사건 이래 관직을 떼이고 여주에 낙향해 있던 김병기가 심사 꼬인 말로 받았다.
“어험. 움츠렸다 뛰는 개구리가 더 멀리 뛰는 법이지. 아우님에게도 곧 좋은 소식이 있겠지”
김병학이 좋게 얼렀다. 가까운 동생이라 해도 이제 50줄에 들어서려는, 그것도 예조, 호조, 병조 판서를 거쳐 훈련대장까지 역임한 바 있는 그를 좌중 앞에서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안동 김문의 정신적 지주인 김좌근의 양자가 아니던가.
“흥, 언감생심입니다요. 소인은 절대로 이하응이 아래에서는 벼슬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시켜준 대도 싫다 이 말입니다.”
수그러들지 않는 김병기의 말에 좌중이 싸늘하게 얼었다. 모두가 놀란 눈으로 좌우를 살폈다. 젊은 조영하가 슬쩍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살폈다. 먼 발치 사랑으로 들어오는 문에서 바깥을 경계하고 있는 김병학네 하인과 집사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현직 영의정의 사택인만큼 그 정도 대비가 안 되어 있겠나 싶으면서도 워낙 놀란 가슴이라 반사적으로 보인 행동이었다.
“아우의 비분강개야 내 왜 모르겠나. 그러나 매사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니 목소리를 좀 낮추게.”
김병학이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김병기를 달랬다. 흥선대원군에 대한 김병기의 감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김병기의 그런 행동을 고압적으로 제지하지는 않았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흥선이야말로 저희 안동 김문의 원수 뿐 아니라 이 나라 사대부의 적이 아니겠습니까. 어디 그 뿐입니까 시정무뢰배 파락호를 국부(國父)의 지위로 만들어준 대비마마의 은공을 원수로 갚은 배은망덕한 자가 아니옵니까.”
이때 김병국이 나서서 김병기를 거들었다. 게다가 한술 더 떠 흥선대원군의 간계에 넘어가 수렴첨정을 거두고 유폐되다시피 낙선재에 기거하고 있는 조대비의 건을 건드렸다.
파락호시절부터 대원군과 교류를 맺었던 연분으로 자신과 친형 김병학은 여전히 지위를 보장받고 있었기에 내쳐진 사촌형 김병기를 챙기지 않을 수 없었다. 더불어 한 때는 경쟁관계였으나 대원군의 전횡으로 한 배를 타게 된 풍양 조씨 세력을 의식한 발언이었다. 반응은 곧바로 왔다.
“저희끼리니 말씀입니다만 사영(思穎: 김병기의 호) 영감의 비분강개가 남의 일 같다는 생각이 아니 듭니다. 지금의 주상께오서 보위에 오르신 것도 따지고 보면 대비마마의 은총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와 대비마마를 저버리고 전횡을 일삼다니요. 저희 집안도 믿는 개에게 발등을 물린 격입니다.”
22세의 젊은 조성하였다. 병조판서였던 병준의 아들로 철종12년 (1861) 식년문과에 을과 급제한 후 1864년 현 왕 즉위와 함께 특제되고, 이어 작년에 이조참의가 되었으나 이후 중용되지 못하고 있는 처지였다.
“현 조정에 대한 불만은 우리뿐만이 아닙니다. 이러다간 외세가 아니라 내부 분란으로 나라가 결딴이 날 판입니다.”
이번엔 이조참판조영하가 말했다.
“천주교도들을 죽이는 꼴을 보십시오. 이건 정말이지......”
“헛험, 험.”
김병학이 헛기침을 해댔다. 천주교 탄압을 극력 주장한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그....그건 그렇다 쳐도 금간에 들리는 백성의 원성은 또 어떻습니까? 군비 확충을 위한다는 명목이긴 하나 도문세라 하여 도성문을 출입하는 상품에 세를 매기지를 않나 사설 염분과 어장을 몰수하여 수세하고 삼세(蔘稅)며 원납전이며 세금 걷는 악귀가 되어 있습니다.”
조영하가 말을 돌려 마쳤다.
“그건 그래도 참을만 하지요. 그깟 무지렁이들이야 어찌 되든 알아서 할 바 입니다만, 이제 사대부들에게도 포를 바치게 하려 한다지 않습니까? 이러다간 나라가 뒤집혀도 뒤집힐 겝니다. 국초 이래 단 한 번도 세금이란 걸 내 본 일이 없는 양반에게 상민과 같이 포를 걷겠다함은 반상의 구별을 없애겠다는 얘기 아닙니까. 이건 아예 대놓고 천주학쟁이들의 논리와 궤를 같이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김병국의 말이었다.
“민폐를 줄이는 한편 조정재정에 도움이 되는 정책이랍시고 서원철폐를 추진하는데 이것의 향방도 문제입니다. 친정 초부터 첩설(疊設)·사설(私設) 서원을 조사하여 폐지하고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조사하여 불법적인 것은 국고로 돌리라는 명을 내리더니 급기야 유림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만동묘에 대해서도 정폐를 하질 않았습니까.
종친에 대해 단행했던 사면조처와 경복궁 중건 사업에 대한 양반유생의 조직적인 반대를 막고자 던진 선제 수 따위에 농간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젠 서원에 딸린 토지도 세금을 내고, 서원의 장은 지방 수령이 맡아 서원을 주관하는 조처를 단행하고 있으니 머지않아 대부분의 서원도 철폐될 것입니다. 그 지경까지 가다면 팔도의 유림이 들고 일어날 터이고 우리의 안위도 장담키 어렵습니다.”
김병기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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