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9 장 무영도(無影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사내의 무릎 위에 놓인 것은 검(劍)이라고 하기보다 도(刀)라 해야 옳았다. 길이는 대략 다섯 자 정도로 보통의 검보다 길고, 폭은 손 한마디 보다 좁다. 고동(도동, 刀銅)이나 도반(刀盤)도 없다. 자주색의 도집은 품고 있는 도와 하나가 된 듯 매끄럽게 깎은 봉(棒)처럼 밋밋하다.
자색의 수실로 매듭을 지어 놓은 도채(刀彩)만 아니라면 도라는 것도 모를 정도. 단순한 것 같았지만 고풍스런 느낌과 함께 매우 진귀한 도라는 느낌이 들게 했다. 살천문에 몸담고 있는 인물들의 생사를 좌우할 수 있는 신물(信物)이 바로 이 도였다. 무영도(無影刀)란 이름을 가진 이 도는 타 문파의 장문영부와 같은 것. 그 동안 손질을 멈추지 않은 듯 윤기가 흐른다.
사아--악---!
무영도를 천천히 뽑자 칼날이 연마석에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집에 연마석을 넣어 도를 뽑을 때나 넣을 때 날이 갈리는 것은 왜도(倭刀)다. 그러고 보니 모양은 달랐지만 전체적으로 풍기는 느낌이 왜도와 비슷했다. 도신은 아무런 장식도, 문양도 없이 매끄러웠다.
한지(漢紙)를 입에 물고 깨끗한 베로 도신을 조금씩 정성스레 닦아 나갔다. 닦는다는 표현보다는 조심스럽게 어루만진다는 표현이 옳았다. 도신(刀身)이 불빛을 받아 현란한 광휘를 뿜고 있었다. 차 한 잔 마실 시각이 지났을까? 닦은 도신을 이리저리 불빛에 비추어 보더니 흡족한 듯 도를 도집에 꽂았다. 그리고 입에 물고 있던 한지가 떨어져 내릴 즈음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멋진 도(刀)로구려."
아쉬웠다. 조금 더 시간이 있었다면 도파(刀把:도의 손잡이)와 도집을 닦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사람의 바람만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차 한 잔 하시겠소?"
사내는 여전히 가부좌를 풀지 않은 채 연무장 입구에 서 있는 인물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다. 어릴 적 모습은 사라지고 눈매나 입술, 그리고 턱 선이 그 분을 닮아 있었다. 갑자기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 듯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자신의 임무를 다하지 못한 자책감은 문득문득 이런 식으로 가슴에 통증을 가져온다.
그의 뒤로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인물들도 보인다. 아마 균대위의 수장들일 것이다. 제법 위엄도 갖추었고, 녹록치 않은 인물들을 거두었으니 돌아가신 그 분의 마음도 한결 편안하실 터였다.
"왜 포기했소?"
다행히 수하들은 자신의 명령을 어기지 않았다. 아마 자신의 수하들은 저들이 들어 온 길에 병기를 바닥에 던져놓고 농성이라도 하듯 앉아서 지켜만 보았을 것이다.
"수하들을 물리쳐 주시겠소?"
병기를 닦고 있는 이유는 하나다. 더구나 누군가 자신을 찾아올 것을 알고 독문병기를 다듬고 있었던 것은 승부를 준비했다는 의미다.
"대가는?"
"내 목숨…! 그리고 영주는 많은 사실을 알게 될 것이오."
담천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승부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승부 뒤에는? 우교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 두 사람만이 이곳에 남는 순간 이 연무장의 모든 문이 닫히게 될 것이오. 그리고 우리 중 하나가 이 세상에 사라지게 되면 다시 열리게 될 것이오."
두 사람 중 누군가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오직 두 사람의 실력에 의해 삶과 죽음이 정해진다는 말이었다.
"더욱 마음에 드는군."
담천의가 고개를 돌려 균대위의 수장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상대의 요구대로 승부에 임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영주께서는…."
단사가 나서자 담천의가 고개를 저었다. 단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어차피 상대는 담천의의 부친을 가장 가깝게 모셨던 인물이다.
"비켜주겠소?"
담천의가 풍철한을 비롯한 나머지 수장들을 보고 말했다. 이미 담천의의 무위가 어떠한 경지에 올랐음을 모를 바는 아니나 그들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어렸다. 초혼령의 행사는 이런 것이 아니다. 그러나 불복하는 것 역시 수하된 도리가 아니다.
"…!"
풍철한이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담천의는 마음을 굳힌 상태다. 자신의 부친을 모셨던 인물을 단순히 초혼령의 위엄으로 치죄하기 싫었을지도 몰랐다. 풍철한은 주위의 수장들을 보며 말했다.
"나가지."
풍철한은 담천의를 믿었다. 이런 정도의 난관을 극복하지 못한 다음에야 어찌 균대위를 완전하게 장악할 수 있을까? 더구나 상대는 담천의의 부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자였다. 자신의 손으로 상대의 생사를 결정하는 것을 무엇보다 바랄 것이다.
단사의 얼굴에는 근심스런 기색이 떠올랐다. 자신들이 이 연무장을 나가는 순간 모든 문이 닫힌다면 그 어떤 결과가 올지 모른다. 이런 일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모험이었다. 하지만 완강한 담천의와 풍철한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녀는 나직하게 탄식하며 풍철한의 뒤를 이어 연무장을 나섰다.
여인의 입장에서 보면 사내들이란 정말 가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행동을 한다. 그깟 자존심이나 명예가 큰 멍에나 되는 듯이 그것에 목을 매는 것이다. 그들이 들어 온 곳으로 나가는 순간 우교가 경고한 대로 일제히 모든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쿠--쿵, 타탁----
심지어 창문까지도 두꺼운 나무틀에 의해 닫히자 연무장 안은 완전하게 밀폐된 공간으로 변해버렸다. 소리까지 외부와 완전하게 차단된 독립공간이었다. 하지만 실내는 곳곳에 걸려있는 유등으로 인해 대낮같이 밝았다.
"…!"
우교가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게 보였다. 두 사람 간의 거리는 대략 이장 정도. 담천의의 입 꼬리에 알 수 없는 미소가 달렸다.
(많이 변했군.)
담천의는 이곳에 들어와 우교를 보는 순간 그를 희미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어릴 적 몇 번인가 보았던 모습이었다. 언제나 석상같이 굳어있는 모습이었고, 어린 그에게도 따스한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사내였다. 간혹 음울한 눈빛조차도 어린 마음에는 두려운 생각이 들 정도여서 가까이 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바로 그 사내였다. 언뜻 어디선가 나타나 부친에게 고개를 숙이곤 했었다. 그의 목소리도 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저 부친이 몇 마디를 해주면 그는 고개를 숙이고는 훌쩍 어디론가 사라졌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