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부부는 전생에 한국 사람이었을까

<신 아연의 이민짬밥> 모국 정체성 고수하는 호주의 해외 입양정책

등록 2005.11.07 09:34수정 2005.11.07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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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모르는 호주인으로부터 이메일 한 통을 받았다.


한국 아동 입양 계획을 1년여 간에 걸쳐 추진하고 있는 호주인이었는데 이제 아이를 데려오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던 중에 뜻하지 않은 난관을 만났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나에게 몇 가지 도움을 청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아이를 호주로 데려오기에 앞서 마지막 절차로 호주측의 알선기관에서 가정방문을 나왔는데, 자신의 집에서 한국적인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며 이 부분을 개선한 후에 재심사를 받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문화와 전통, 생활상, 풍물이 담긴 상징적인 그림이나 장식품, 집기 따위 등 구체적인 지적 하나 없이 지금 상태로는 한국아동을 입양하기에 '자격 미달'이라고 했다는 것.

그는 입양아들이 한국에서 보아오던 익숙한 풍경이나 물건들을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호주라는 나라에서 접했을 경우, 갑자기 바뀐 환경에서 오는 문화 충격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입양기관의 취지를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는 내게 어디에서 한국의 전통 민속 공예품이나 토속적인 것들을 구할 수 있는지 알려달라고 했다. 내 생각엔 지체 없이 시드니 등 대도시에 있는 한국 동포상점에 그런 물품들을 주문해도 그 집의 거실과 방을 장식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 이메일을 받고 난 뒤 솔직한 내 심정은 급한 대로 당장 그를 만나 하다못해 우리 집에 있는 태극부채라도 전해주고 싶었다.

예전부터 호주측 관련기관이 제시하는 해외입양의 조건과 절차가 까다롭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왔지만 이런 측면까지 세세하게 신경을 쓰는지는 몰랐다. 사실 해외에서 자녀를 입양하는 양부모들의 열의와 정성은 사람들이 짐작하는 것 이상으로 대단하다.


아이 식성 생각해 한국 요리법 수강하기도

그것은 단지 알선기관이 제시하는 까다로운 ‘필요충분조건’을 만족시켜서만이 아니다. 그들은 아이를 데려오기 전부터 그 나라 말을 미리 공부한다. 또 아이를 데려온 후에는 아이의 모국어를 함께 배우며 아이의 식성을 생각해 그 나라의 요리법을 수강하기도 한다.


가정에 따라서는 입양 신청을 해 놓고 기다리는 1년 정도를 아이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기간으로 보내기도 한다. 자기 가정의 역사와 가풍, 부모와 조부모가 살아온 모습 등을 사진이라 글로 정리해 아이에게 보여줌으로써 ‘정신적, 심리적 유대의 탯줄’을 형성하려고 노력한다.

내가 사는 도시에서 다섯 살배기 한국 남자아이를 키우고 있는 어떤 호주인 부부는 아이가 한국말을 잊어버릴까봐 또래가 있는 주변의 한국 가정을 모조리 친구로 삼은 후, 자기 아이와 놀 때는 영어를 쓰지 말고 제발 한국말로 해 줄 것을 거듭 당부한다.

덕분에 그 집 꼬마는 서양 부모를 한국말로 '엄마, 아빠'라고 부르는 특권 아닌 특권을 누리고 있다.

이들은 아이를 데려올 때 부모는 물론이고 조부모까지 동반했는데, 한국 땅에 첫 발을 디딜 때의 느낌이 예사롭지 않았다고 회상하며 그때 그 기분은 지금도 생생하단다. 분명히 초행이었건만 언젠가 한 번 와 본 곳처럼 편안하고 포근함이 느껴졌다고 한다.

그 부부는 아직 한국의 정서가 미혼모가 떳떳하게 아이를 키우기에는 그다지 관용적이지 않기 때문에 해외 입양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으며 과거 한국 국내 입양의 경우 남아를 선호했지만 지금은 반대 추세라는 것까지 인지하고 있었다. 즉 여자아이들이 키우기도 쉽고 키우는 재미도 더하기 때문에 요즘은 여아들의 국내 입양이 우세하다는 게 그들의 설명이었다.

만약 전생이 있다면 그 가족들은 아마도 한국 사람이 아니었을까.

거대한 용광로와 같은 이민자의 나라 호주는 나라의 구성원인 각 민족마다 문화적 다양성과 전통, 모국에 대한 정체성을 고수하도록 권장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해외입양아에 대한 태도 역시 이와 맥을 같이 한다. 내가 받은 이메일의 내용처럼 최근에는 각 나라의 전통적인 생활과 문화가 실내 장식과 집 꾸미기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배어나도록 범주를 구체화하면서 넓혀가고 있는 듯하다.

취지는 역시 양부모 밑에서 호주인으로 살아가되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배려하기 위한 것일 터. 과거에는 양부모가 입양아를 그대로 안아 흡수해 자기 나라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지금의 입양정책은 양부모가 되레 입양아의 모국을 배우고 알아나가는 추세로 바뀌고 있다.

호주의 해외입양아 가운데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 입양아들. 이 나라에 우리 문화와 전통을 알리는 큰 역할을 이들이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역설과도 같은 어쩔 수 없는 서글픔이 느껴진다.

덧붙이는 글 | 기사의 일부는 <부산일보>에도 실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기사의 일부는 <부산일보>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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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1992년 호주 이민, 호주동아일보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을 지냈다. 시드니에서 프랑스 레스토랑 비스트로 메메를 꾸리며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부산일보 등에 글을 쓰고 있다. 이민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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