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정통무협 단장기 342회

등록 2006.01.09 08:21수정 2006.01.09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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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2 장 연동진입(蓮洞進入)

백여 초가 순식간에 흐른 것 같았다. 두 사람의 전신에는 몇 줄기의 검흔이 그어져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허나 상황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미세한 변화였지만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공격했던 전월헌이 조심스럽게 대응하고 있었다. 괴이로운 연검의 변화를 이제 담천의가 어느 정도 읽고 있는 것 같았다.


완벽한 검로였지만 담천의의 검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자신의 초식과 초식의 연결고리를 끊어놓고 있었다. 전월헌과 담천의는 잔목과 잔목 사이를 타고 급히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파파파파----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주위는 요동치고 있었다. 하지만 가는 가지 위에 흔들거리며 발을 옮겨 딛는 전월헌은 때가 온 것을 직감했다. 그는 바위를 타고 올라 잔목의 꼭대기에 서 있다가 자신의 하체를 노리고 따라 붙는 담천의를 보며 내심 득의의 미소를 흘렸다.

(당해주는 척 하지. 하지만 너는 반드시 죽는다!)

상대는 자신이 가진 비장의 수를 모른다. 그는 일순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양팔을 좌우로 쭉 뻗었다. 마치 금계독립(金鷄獨立)의 자세 같았지만 전신이 훤히 드러나 있는 상태다. 허나 그것도 잠시 발을 바꾸며 아래에서 치솟아 오르는 담천의를 향해 맹렬하게 맞부닥쳐 가고 있었다. 그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전신이 텅 빈 가운데 상대를 베겠다는 동귀어진의 수법처럼 보였다.


그는 비조처럼 날며 사선으로 검을 내려치고 있었다. 어깨서부터 가슴을 베어가는 단순한 동작. 하지만 전신의 공력을 담은 일격이라 연검은 마치 서리가 내린 듯 어둠 속에서도 흰빛을 번뜩였고, 연검 끝에 매달린 백색의 검강도 더 늘어나 있는 것으로 보였다.

츄 ---앗 ---!


담천의는 상대의 모습에서 이제 승부를 보려고 하는 것을 알았다. 지금까지 충분하게 상대의 연검에서 펼쳐지는 변화와 기괴함을 보았던 터였다. 더구나 상대는 당황하며 조급해하고 있었다. 이것은 기회였다. 다만 지금까지 그가 조심스러웠던 것은 백결이 남긴 한 마디 때문이었다.

-- 보이지 않는 유리검을 조심하게.

보이지 않는 유리검이 무엇일까? 저 자는 언제 그 치명적인 유리검을 보일 것인가? 그 위력은 어느 정도일까? 허나 그에게는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 유리검이 무엇이든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 역시 수면을 박차며 검을 수평으로 뉘여 전월헌과 마주쳐갔다. 금속과 금속이 부닥치는 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마치 그림자가 움직이듯 허공에서 엉키며 비산되는 검영(劍影)은 마치 중간 중간 사라졌다가는 나타났다.

헌데 그 순간이었다. 전월헌의 검을 옆으로 튕겨내고 그의 가슴 위로 틈이 보이자 담천의는 그의 목줄기를 노리며 베어갔다. 그것은 방어와 동시에 공격이 이루어진 것이어서 막을 수는 없었다. 전월헌이 피하지 않는다면 꼼짝없이 당할 판이었다.

하지만 전월헌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튕겨진 검을 아래서부터 사각으로 담천의의 가슴을 베어오며 담천의의 검을 왼팔로 막으려는 듯 보였다. 그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금석이라도 무우처럼 베어내는 담천의의 검을 팔로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팔 하나를 주고 담천의 가슴을 베려는 고육지책처럼 보였다. 그 순간 전월헌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맺혔다.

결정적인 기회였다. 그의 연검이 현란한 변화를 일으키면서 수십 송이의 검화(劍花)를 피어냈다. 마치 꽃밭에 꽃이 만개한 듯 수십 송이의 검화는 담천의의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더구나 그 검화에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을 입을 터. 그 순간 전월헌이 왼손을 뒤집으면서 왼팔을 쭉 뻗었다. 장력이라도 날리려는 모양이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그의 왼팔이 폭발을 일으키는 듯한 광휘가 터져 나오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아홉 줄기의 암영이 허공을 갈랐다. 마치 빛이 뭉쳐진 듯한 굉렬한 폭죽 속에 보이지 않는 아홉 줄기의 암영. 그것은 난무하는 검화 사이를 뚫으며 담천의를 덮쳤다.

퍼--퍼---퍽!

짧은 순간이었지만 담천의의 검이 급박하게 십여 번의 변화를 일으켰다. 무언가 터져 나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두 사람 허공에서 뒤엉켜들었다가 튕기듯 신형이 좌우로 갈라져 떨어져 내렸다. 고요한 수면이 일그러지고 있었고, 비산되는 검기에 수면이 쫙쫙 갈라져 나갔다. 무릎까지 잠기는 물에서 두어 걸음 밀리다 멈춘 담천의의 신형이 휘청거렸다. 어찌된 일일까? 그의 어깨와 가슴 그리고 오른 팔에서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마주쳤던 허공에 먼지가 날리 듯 희미하게 반짝이는 가루들이 날리고 있었다. 담천의의 만검 끝에서 핏물이 한 방울씩 떨어져 내렸다.

“이것이 유리검이었소?”

담천의는 고통스런 얼굴로 어깨에 박혀있던 무언가를 뽑아내고 있었다. 그것은 손바닥만한 길이의 비수 모양이었는데 기이한 것은 매우 투명하고 매끄러워서 묻어 나온 피가 쪼르륵 떨어져 내렸다. 말 그대로 유리검이었다. 수정(水晶)으로 정교하게 세공해서 만든 그 유리검은 기척도 없이 파고드는 무서운 검이었다. 미리 염두에 두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아홉 개의 유리검은 담천의의 몸에 박혔을 터였다. 급박한 순간에 암영을 보자마자 몸을 비틀며 대응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고 치명적인 사혈을 피해 맞은 것이 운이라면 운이었다.

“어… 끄르륵….”

어떻게 유리검의 존재를 알았는지 묻고 싶었던 것일게다. 하지만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말을 하려는 순간 전월헌의 목에서는 가는 혈선이 나타났고, 그것은 곧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꾸역꾸역 선혈이 밀려나왔다.

꺼져가는 전월헌의 눈은 많은 것을 묻고 있었다. 유리검의 존재는 그렇다 해도 분명히 담천의의 검이 미칠 수 있는 범위에서 충분히 물러났음에도 어떻게 자신의 목을 그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분명히 피했다고 생각했다. 유리검을 뿌림과 동시에 물러났기 때문에 충분히 상대의 검역을 벗어났다고 확신했다.

더구나 최소한 자신의 목을 그으려면 자신의 연검에 상대의 가슴이 베어지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암울해지는 그의 눈에 비친 담천의의 가슴은 아주 멀쩡했다. 부러진 유리검만이 그의 가슴에 한 치 정도 파고들었을 뿐이었다.

“만검은 허공을 격하오. 거리는 단지 사람의 관념 속에 정해진 것일 뿐….”

그래 그것이었어. 자네가 만검의 요체를 깨달았다는 사실을 잠시 잊은 것이 실수였군. 경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자네를 너무나 몰랐어. 그래…. 차라리 이따위 눈속임이나 하는 유리검 따위를 믿는 것이 아니었는데…. 천검(天劍)을 극성까지 익혔더라면…. 아니 유리검을 믿지 않고 팔성(八成)에 이른 천검만으로 상대했더라면 최소한 이리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강명 사형의 말이 옳았는지 모르겠군. 괄목상대란 말이 자네에게 적합한 말이란 사실을 나는 믿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그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검은 천이 그의 눈을 덮는 듯 모든 것이 어둠으로 변해버렸다. 그것이 비록 죽음이라 할지라도 죽는 그 순간까지 상대에게 자신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다. 허나 잠시 후 그의 신형이 뻣뻣하게 뒤로 넘어갔다. 아마 모든 것이 암흑으로 변해버려 보이지 않는 그의 눈에 떠오른 것은 유일하게 운령이었을 것이다. 그가 사랑하는 여자. 천마곡을 떠나올 때 한번이라도 보았으면 좋았을 것을….

철퍼덕…. 파악---!

전월헌의 몸이 수면 위로 넘어가자 물보라가 튀었다. 그의 목은 반쯤 갈라진 채 옆으로 비틀어졌다. 갈라진 목에서 피분수가 뿜어지며 수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는 청운의 꿈을 안고 지금껏 그 기반을 착실하게 쌓아왔다. 하지만 지금 그는 죽었다. 그 참기 힘든 고련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은 것이다. 무인의 삶이란 이렇게 허망하다.

승부의 세계란 예외가 없다. 그것이 검이 되었던, 아니면 도박이 되었던 자신에게 주어진 운이 지속된다면 몰라도 운이 다하는 날 그에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것이다.

담천의는 느릿하게 물가로 걸어 나왔다. 이제는 미약한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고요한 공간을 철벅거리는 소리가 깨고 있었다. 전월헌의 검은 무서웠다. 강명의 검과는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동안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저기 쓰러져 있는 시체는 자신이었을 터였다. 어쩌면 전월헌과 마찬가지로 자신 역시 승부를 서둘렀다면 그 결과가 어찌 되었을지 몰랐다. 백결의 단 한 마디 충고에 끈기 있게 참고 버틴 것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그어 놓았다.

그는 물가에 나오자마자 털썩 주저앉았다. 물위로 반쯤 나온 전월헌의 시체가 어렴풋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전월헌과의 승부는 꽤 오랜 시간동안 지속된 것 같았다. 아직 해가 뜨지는 않았지만 어느덧 동녘에는 여명(黎明)이 비치고 있었다. 곧 날이 밝을 것 같았다.

(우문주는 어떻게 되었을까? 추학은…? 도망간 백결은 그들의 추격에서 벗어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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