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다섯 명의 애인과 전화통화를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연습

등록 2006.01.16 13:30수정 2006.01.16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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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순천만

순천만 ⓒ 안준철

선생님. 안녕하세요. 방학 잘 보내시고 계시나요? 저 혜민이에요. 저는 잘 보내고 있어요. 운동도 하고, 자격증 따려고 학원도 다니면서요. 매일 매일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어떤 날에는 정신없이 하루를 마감하기도 하구요. 선생님께서 저한테 전화 하셨다고 동생이 가르쳐줬어요.

선생님께서 전화한 시간에 운동하러 나가거든요. 운동할 땐 핸드폰 안가지고 다니거든요. 선생님이 왜 전화하셨는지 제가 맞춰 볼까요? 방학 잘 보내고 있는지 궁금하셔서 전화하셨죠? 무슨 일은 없는지. 그리고 또 31일 날 학교 등교일이니 꼭 나오라고 전화하신 거 맞죠? 아닌가요? 그냥 제가 추측해본 거예요.


걸어서 순천만에 다녀온 다음 날, 저는 저녁밥을 먹자마자 전화통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방학을 잘 보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무려 두 달에 가까운 긴 겨울방학을 아무런 계획도 없이 보내다가 방학이 끝나고서야 후회하는 일을 반복하지 않도록 미리 손을 쓴 것이지요. 1번부터 35번까지 전화통화를 다 끝내고 나니 밤 열시가 넘어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 운동을 하느라 집에 없어서 전화를 받지 못한 한 아이가 메일을 보내온 것입니다.

저는 학기 중에도 가끔 반 아이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 집으로 전화를 걸곤 했습니다. 대개는 부모님들이 먼저 전화를 받으시는데 대부분 혹시라도 자녀에게 무슨 일이 있어서 전화를 했나 싶어 조금 놀라는 음성이었지요. 어제는 그런 기색이 조금도 없이 밝은 목소리로 저의 안부를 먼저 물으시고 곧바로 전화를 바꿔주신 부모님들이 많았습니다. 한 해 동안의 경험으로 제가 전화를 건 이유를 간파하신 까닭이지요.

전화를 받는 아이들의 반응도 가지각색입니다. 아이들의 이름이 다르고 개성이 다르니 당연한 일이지요. 그럼에도 학교에서는 서른다섯 명의 아이들을 하나의 단위로 묶어서 몰개성의 관계로 만나야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가정환경이 열악하거나 문제를 저지르는 아이들에게만 역차별의 사랑을 전할 뿐, 평소 말수가 적고 평범해 보이는 보통 아이들과는 그럭저럭 지내며 해를 넘기기 일쑤입니다.

어제 전화로 대화를 나눈 아이들은 모두 서른 명 남짓. 그들과 약 3시간쯤 수다를 떨었으니 개인 당 평균 6분가량 대화를 나눈 셈입니다. 하지만 말이 대화지 사실은 저쪽은 듣기만 하고 이쪽은 말하기만 하는 일방통행식의 재미없는 소통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 잘못은 당연히 교사인 저에게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교사는 학생들과 소통할 수 있는 전문적인 능력과 지식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점에서, 저는 어제 아이들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연습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연습의 효과는 이제 곧 석별의 정을 나누어야할 제자들이 아닌 미래의 새로운 아이들에게 소용이 되겠지만 말입니다. 어제 저를 행복하게 해준 두 아이와의 통화 내역입니다.


a 순천만 가는 길

순천만 가는 길 ⓒ 안준철

"여보세요?"
"응. 담임선생님이야. 방학 잘 보내고 있지?"
"예? 예…."
"대답이 시원찮은 거 보니까 아닌 것 같네?"
"나름대로는 알차게 보내고 있어요."

"그래? 오늘 아침 몇 시에 일어났어?"
"예? 오후 1시에 일어났어요."
"뭐? 나름대로 알차게 보내고 있다면서 1시에 일어나?"
"1시까지 알차게 잤어요."
"그거 말 되네. 또 뭘 알차게 했는데?"
"알차게 책도 읽고 있어요."


"그래? 제목이 뭔데?"
"키다리 아저씨요."
"키다리 아저씨, 재미있지?"
"잘 모르겠어요. 단어가 어려워서 지금은 열심히 단어만 찾고 있어요."
"단어를 찾다니? 그렇게 어려워?"
"영어 어휘가 좀 부족해서요."

"아니, 그럼 너 원서 보고 있는 거야?"
"예. 언니가 권해주셨어요."
"와, 정말 방학 알차게 보내고 있네."
"그렇죠? 저 알차게 보내는 거 맞죠?"
"그래. 늦잠 자는 거만 고치면 되겠다."
"고칠게요."

"요즘 선생님, 몇 시에 일어나는지 알아?"
"몇 시에 일어나시는데요?"
"아침 여섯 시. 어느 때는 다섯 시 반."
"그렇게 일찍 일어나서 뭐하시는데요?"
"공부하지. 한 시간 반 동안 영어 방송 듣고, 다음에는 욕실에 들어가 반신욕하면서 책을 읽지. 방학하고 지금까지 책 다섯 권이나 읽었어. 방학 끝날 때까지 스무 권 쯤 읽을 생각이야. 그러고 보니 너처럼 영어 원서는 안 읽었네? 네가 나보다 낫다. 그지?"

"늦잠 자는 것만 고치면요."
"그래. 다음번에 전화할 땐 발전이 있기를 기대하마. 그럼 남은 방학 잘 보내고. 안녕!"
"선생님도 방학 잘 보내세요."

a 순천만 갈대밭

순천만 갈대밭 ⓒ 안준철

"여보세요?"
"나야, 담임선생님. 방학 잘 보내고 있니?"
"허무하게 보내고 있어요."
"허무하게 보내고 있다고? 야, 그 말 한 번 희망적이다."
"예?"

"그렇잖아. 방학을 허무하게 보내고 있으면서도 너처럼 허무하게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문제잖아. 허무한 줄 알아야 그 허무로부터 탈출할 거 아니야? 넌 이제 허무로부터 탈출할 일만 남았네."
"근데 저 탈출할 힘도 없이 흐물흐물해요."

"그것이 희망이라니까. 아무 계획도 없이 무대책으로 방학을 보내고 있으면서도 흐물흐물하지도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사는 아이들이 있어요. 그런 아이들에 비하면 넌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희망이 있는 거지? 그리고 넌 꿈이 있잖아. 꿈을 이룰 재능도 있고. 그 재능을 썩히면 안돼."

"참, 선생님 저 꿈이 바뀌었어요."
"그래? 어떻게 바뀌었는데?"
"실내디자이너가 될 거예요."
"그건 지난번에 얘기했잖아. 만화가가 되기로 했는데 실내디자이너로 바꿨다고. 근데 만화가든 실내디자이너든 네 미술적인 재능이 쓰이는 것은 마찬가지잖아. 그리고 너 같은 아이들을 위해서 방학이 필요한 거야. 학교에서 해주지 못하는 거 네 스스로 공부하면서 꿈을 이루어가야지. 알았지?"

"알았어요. 근데 선생님은 방학 어떻게 보내셨어요?"
"나야, 잘 보내고 있지. 어제는 걸어서 순천만에 다녀왔어. 동천에서 순천만까지 길이 나 있을까, 궁금했거든. 네 시간쯤 걸렸나봐. 다리를 건너서 가야하는데 그냥 가다가 길을 잃은 거야. 그래서 시간이 더 걸렸지."

"와, 대단하세요."
"그런데 길을 잘못 들어 돌아 나오면서 무슨 생각한 줄 아니?"
"무슨 생각하셨는데요?"
"실패도 실패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어. 그 길이 잘못된 것인 줄 알았으니까 다시는 그 길로 가지 않을 거 아니야. 그렇지 않니?"
"맞아요."

"자, 그럼 오늘부터 흐물흐물하지 않는 거다. 허무를 박차고 일어나는 거야. 남은 방학 잘 보내고. 안녕!"
"선생님도 방학 잘 보내세요. 전화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이들과 일일이 이런 식으로 전화를 하다보면 3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맙니다. 언젠가 제가 아끼는 후배교사에게 이런 일종의 전화상담 이야기를 학급운영의 한 방안으로 소개해주었더니 좀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3시간씩이나 아이들과 통화를 하다보면 지루하지 않더냐고 묻더군요. 저는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자넨 애인하고 통화하면서 지루하던가?"

이제 미운 정 고운 정이 듬뿍 든 아이들과 만날 날은 딱 3일뿐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 긴 방학이 커다란 공백처럼 놓여 있습니다. 그 공터에 씨를 뿌리고 열매 맺기까지 땀 흘리고 수고할 주인은 바로 아이들 자신이지만 옆에서 지켜주는 사람의 역할도 필요합니다.

잊지 말아야할 것은 아이들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용기와 힘을 주는 것, 거기까지가 어른들이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방학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아이들 자신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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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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