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는 그대론데 우리만 개판됐다"

[인터뷰] <기억을 잃어버린 도시>낸 목수김씨 김진송씨

등록 2006.02.10 15:03수정 2006.02.13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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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잃어버린 도시>의 저자 김진송씨. 그가 기억하는 '그 동네'는 서울 노량진이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우리 나이로 마흔여덟 살이 된 사내는 다섯 살 무렵의 초여름 한낮, 모든 세간을 싼 보퉁이를 인 어머니 뒤를 따라 '그 동네'에 들어서던 순간부터 기억해 내기 시작했다. '그 동네'는 "철도와 강 사이에 끼어 있었기 때문"에 "안데스 산맥 서쪽에 길게 자리 잡고 있는 칠레라는 나라와 같이 생겼다"고 말할 수 있다.

사내는 "아무도 그날이 처음 동네를 들어선 날인지를 말해 주지 않았지만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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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잃어버린 도시> 겉그림 ⓒ 세미콜론

그런 그가 지금 서울시의 지도를 펴고 찬찬히 살펴본다. 아무리 살펴본들 '그 동네'는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그는 혹시 그런 동네가 정말 있었는지 의심이 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그 동네'는 있었다고 확신한다. "'그날'을 기점으로 그 이후의 모든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이유를 단다.

여기서 '그'는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를 쓴 미술평론가이자 목수일로 생계를 이어가며 <목수일기> <나무로 깎는 책벌레 이야기>를 쓴 '목수 김씨' 김진송이고, 그가 기억하는 '그 동네'는 서울 노량진이다.

김진송은 최근 자신이 유년시절을 보냈던 노량진 시절의 기억을 담은 <기억을 잃어버린 도시>(세미콜론 펴냄)를, '1968년 노량진, 사라진 강변마을의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아 펴냈다.

지극히 개인적일 수밖에 없지만 '기억의 재현 프로젝트'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고 "과거를 덮어버린 현재의 장소를 파헤쳐 나올 수 있는 기억의 유물들을 기대하며" 발굴을 시작했다는 그를 2월 3일 오후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작업장에서 만났다.

꽃집 아줌마와 장택상 별장

김진송의 '기억의 재현 프로젝트'는 '그녀'로부터 시작됐다. 그의 책 <기억을 잃어버린 도시> 첫 페이지 첫째 줄 "그녀가 있었다"의 '그녀'. 그의 기억 속에서 놓칠 수 없는 똬리로 남아있는 그녀는 꽃집 아줌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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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기억을 되살려 김진송이 그린 살던 마을풍경 ⓒ 김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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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남소연

어느 날 마을이 텅 빈 것을 알고 고독이란 말을 이해할 수 없는 나이임에도, 고독이란 단지 외롭고 쓸쓸한 느낌이 아니라 슬픔과 공포가 뒤섞인 공황상태라고 생각하던 그는 여닫이문을 열고 나타난 '그녀'에게서 세상에서 남겨진 사람이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을 얻었다. 그녀는 그때까지 그가 보았던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녀와 함께 사는 할아버지가 그의 '적수'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의 기억은 곧바로 그 마을에 살던 사람들과 그 마을을 방문하던 사람들을 떠올린다. 김진송이 기억의 골짜기를 샅샅이 뒤져 떠올린 이름은 처음으로 육체적인(?) 친밀감을 느끼게 해준 홍씨 아줌마, 잊고 싶은 기억의 주인공 쌍둥이 형제, 무지하게 좋아했던 또래 수진이,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사촌형 등이다.

그의 기억 속에는 별장이 매우 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다. 그 별장은 당시 권력자였던 장택상의 것이었다. 김진송이 태어나 가장 먼저 들었던 권력자의 이름인 장택상은 해방 후 수도경찰청장, 제1관구 경찰청장과 외무부장관, 국무총리를 지낸 사람이다. 찔레꽃 나무로 담장이 둘러쳐진 별장은 넉넉한 우물이 있어 그의 집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물을 퍼다 먹었던 곳이기도 했다.

김진송은 별장은 이상향의 실체였으며, 유일하게 남아 있는 기억의 장소가 별장이라는 사실에서 "부와 권력이 기억마저 지배할 수 있다"며 그가 살고 있던 공간에 존재했지만 같은 공간에 있는 장소는 아니라고 기억한다.

플래카드까지 걸며 재개발 경축하는 나라

김진송은 왜 '기억의 재현 프로젝트'를 시작했을까. 티스푼 없이 눈대중으로 배합비율을 맞춰 커피·설탕·크림을 넣고, 컵을 흔들어 섞은 커피 잔을 건넨 후 난로 속에 장작을 던져 넣는 그에게 물었다.

"자신이 살던 곳이 없어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마치 비 온 뒤 마당에 떨어진 나뭇잎을 비로 쓸어버리듯 너무도 쉽게 살던 곳을 부숴버리죠. 오죽하면 아파트 재개발 허가가 나왔다며 플래카드까지 내걸며 '경축'하잖아요."

그는 기억을 거슬러 유년을 떠올릴 때마다 항상 무엇인지 모를 거부감에 맞닥뜨렸다고 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부끄럽고 불안하고 무시무시한 실체….

"맑은 하늘을 보면 왠지 슬퍼지고, 옛날 것들이 없어지는 것을 보면 왠지 불안해지고, 자신도 알지 못했던 성적 호기심의 실체가 어디서 비롯됐는지 궁금해지고 하는데… 기억은 이런 과거의 나와 만나 정서적 안도감을 주는 일종의 치유과정을 경험하게 합니다."

그렇다. 그가 과거를 찾으려는 것은 일종의 위안을 얻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기억의 주체가 개인이 아니라 사회라는 것을 깨닫는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내밀한 기억들조차 그 주체는 유감스럽게도 내가 아닙니다. 나는 사건을 만들 수 없습니다. 사건이 이미 사회적이잖아요. 나는 모든 사건에 대한 경험과 사건의 결과가 가져다 준 행복과 불행의 느낌만을 기억할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무차별식 흔적 지우기는 노량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국이 다 그랬다는 데 있다고 그는 말했다.

김진송은 이번 책을 쓰면서 독일 비평가 벤야민의 <베를린 유년 시절>을 무척 베끼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했다.

"베를린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모습이 똑같습니다. 파리도, 일본의 도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만 개판으로 깨졌습니다. 실제 노량진에 가보니까 깡그리 없어져 벤야민식 작업이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혼재된 세상과 맞닥뜨린 곤혹스러움

김진송은 기억을 재현하기 위해 흩어진 기억을 모으고 유년의 마을을 다시 찾아간다. 그는, 잠실에서 여의도를 향하는 올림픽대로를 달리다 동작동을 넘어서 여의도가 보이는 우측으로 63빌딩의 번쩍거리는 풍경이 압도하기 시작하고, 왼쪽으로 '한냉'이라는 글씨의 굴뚝(?)이 있는 수산시장이 있는 그곳, 노량진을 딱 두 번 찾아갔다고 했다. 그리고 이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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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빌딩에서 바라다본 2005년 노량진 ⓒ 박정훈

"소설이다 뭐 이런 문학 장르를 생각하고 쓴 것이 아니고, 기억을 시작하니까 뭉쳐진 실타래처럼 기억들이 술술 풀어져 나왔습니다. 1부를 쓰는데 50여일 정도밖에 안 걸렸습니다."

그는 그의 책에서 '기억소설'로 이름 붙여진 1부 '강변의 기억'은 2부 '기억의 재현, 혹은 조금 긴 후기'로 독자들을 유인하기 위해 썼다고 했다. 2부 '기억의 재현, 혹은 조금 긴 후기'에서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63빌딩의 꼭대기에서 급강하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떨어지는 기분은 아니었을까.

'원인과 결과가, 과거와 현재가, 현실과 상상이, 자본과 욕망이, 개발과 폐허가 혼재된 세상의 풍경을 맞닥뜨린 곤혹스러움.'

그는 책에서 기억의 절반이 거짓일 것 같다고 했지만 정작 인터뷰할 땐 70% 정도는 맞을 것 같다고 했다. 그가 기억의 정확성에 대해 좀 더 확신을 하는 것은 한강 건너 마포에 살던 친구와 유년 시절의 기억을 교환해본 결과 뜻밖에도 상당부분 일치하더라는 것이다.

몽환처럼 사라지는 기억들

베트남 전쟁, 프라하의 봄, 파리의 5월로 기억되는 1968년, 마을 사람들은 '철거'라는 명령 앞에 오금을 펴지 못하고 정든 그 마을을 떠나 뿔뿔이 흩어진다. 김진송 가족도 그때 대림동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대학에 다니고, 미술평론을 하다 어느 날 미술평론으로는 도무지 생계를 유지할 자신이 없어 '목수 김씨'가 된 김진송.

"사람들은 아직도 나를 '먹물의 객기'쯤으로 보려는 시각이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목수일은 철저하게 생계수단입니다. 목수일로 생계를 유지하지 못한다면 배추장사를 하겠습니다. 돈을 벌어야 하니까."

이제 그의 기억 여행도 끝날 때가 되었다. 그 옛날 꽃집 아줌마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를 버리고 돼지보다 더 돼지 같은 동네의 왈패 '돼지삼촌'과 함께 그 동네를 떠났었던 꽃집 아줌마.

어느 날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는, 스케이트 공장에 다니던 뒷집 아찌가 찾아와 하는 말.

"허어, 꽃집 아줌마가 죽었답니다. 자살을 했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사온 광석식 라디오에서 들었던 뉴스.

"봉천동에 사는 일가족 세 명이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방 안에 연탄을 피워놓고 자살했다."

뒷집 아찌의 전갈과 김진송의 기억, 퍼즐의 아귀가 딱 들어맞는다. 비극이다.

이렇게 그에게 기억의 상징이었던 별장도 헐리고, 그녀도 떠나고 난 지금, 그의 기억은 개발과 발전의 이름으로 폐허가 되어있었다. 공간의 상실은 기억의 상실과 맞닿아 있음을 알게 됐다는 그는, 그래서 잃어버린 기억의 장소를 다시 찾지 않겠다고 했다. 먼 길을 돌아온 기억이 몽환처럼 그에게서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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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남소연

기억을 잃어버린 도시 - 1968 노량진 사라진 강변마을 이야기

김진송 지음,
세미콜론,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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