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 입이 기자들의 상상력 자극하다

[取중眞담] 노 대통령-출입기자 26일 산행 뒷이야기

등록 2006.02.27 18:43수정 2006.02.27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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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6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북악산 산행에 나선 노무현 대통령.

26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북악산 산행에 나선 노무현 대통령. ⓒ 청와대 제공


어제(26일) 노무현 대통령과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산행은 원래 숙정문을 거쳐 북악산 정상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이날 따라 바람이 굉장히 심하게 불어댔다. 노 대통령조차 "여기에는 원래 바람이 없었는데 오늘 여러분이 온다고 바람이 기세를 올린다"고 말할 정도였다.

결국 정상에 오르는 일은 포기해야 했다. 대신 정상에 오르기 직전 쉼터에서 '산상간담회'를 열었다. 노 대통령은 "나는 아무 말도 안 할 테니까 경치들이나 보라"며 기자들에게 북악산 완상(玩賞)을 권했다.

물론 일부 기자들이 기자근성을 발휘했지만 노 대통령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그나마 기자들의 계속된 취재 공세에, 그는 "(여기서) 나도 말을 할까 했는데 따뜻한 방(오찬장을 가리킴)에 가서 하자"며 평소와 다르게 신중한 태도를 선보였다.

먼저 비보도 푼 노 대통령 "오늘 중요한 얘기는 없다"고 했지만

이에 기자들이 "오늘은 (오찬장 발언이) 오프(비보도)라고 하던데"라고 하자 이렇게 얘기했다(청와대와 출입기자단은 산행간 취재만 보도하고 노 대통령의 오찬장 발언은 비보도하기로 합의했다).

"오프는 없다. 왜냐면 오프를 하려면 오프하는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내가 하는 얘기에는 그럴 만한 얘기가 없다. 우리가 당원들과 만나서 하는 얘기들이 (언론에) 다 나오더라. 그 사람들의 입이 가벼워서 그런 게 아니고 취재기자들의 취재력이 그 사람들의 방어력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오프라는 것이 다 쓸 데 없다. 오늘 내가 하는 얘기는 다 공개로 하자. 이는 중요한 얘기는 없다는 뜻이다. 이거 안 적었다고 해서 난처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노 대통령이 먼저 나서서 비보도 합의를 푼 것이다. 이와 관련, 양정철 홍보기획비서관은 27일 청와대 블로그에 올린 글('산행보고 유감')에서 "비보도를 걸 만큼 은밀한 얘기가 뭐가 있느냐는 대통령 특유의 소탈함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기자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기자들이 "3주년 소회라도 밝혀 달라"고 요청하자 노 대통령이 이렇게 말문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내 생각에 대통령 임기 5년은 좀 긴 것 같다."


순간 기자들의 눈빛이 달라졌다(이 발언이 다음날(27일) 조간신문들의 1면을 장식했다). "비보도를 걸 만큼 중요한 얘기는 없다"던 노 대통령의 입에서 기자들의 '먹잇감'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개헌론'으로 심증 굳힌 기자들 vs 부인하는 대통령

노 대통령은 자신의 발언에 대해 "개인적 소회"가 아니라 "제도적으로" 임기 5년이 길다고 강조했다. 그럼 개헌 승부수라도 띄우겠다는 얘기인가? 그의 발언이 이어졌다.

"대통령이든 국회든 5년간의 계획을 세워서 일을 제대로 하려면 중간 중간에 선거가 자주 있는 것은 좋지 않다. 아주 일하기 곤란한 제도인 것 같다. 선거변수가 끊임없이 끼어들기 때문에 국정이 굉장히 흔들린다. 누가 하든 중간에 하는 선거 때문에 국정이 너무 많이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2년이나 3년을 가지고 중간평가를 한다는데 이미지평가일 수밖에 없지 않나."

이어 기자들이 "그럼 몇 년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미끼 질문'을 던졌다. 4년 중임제 개헌을 염두에 둔 질문이었다. 이에 노 대통령은 "대안을 얘기해봤자 실현될 가능성도 없고 많은 추측만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에 거기까지만 하자"며 더 나아가지 않았다.

노 대통령이 민감한 지점에서 한발 물러서자, 한 기자가 "선거변수가 많다면 임기가 짧다고 생각하는 게 상식 아니냐"고 파고들었다. 노 대통령이 이렇게 답했다.

"(임기) 중간 중간에 자기 선거가 아닌 다른 선거를 계속하면 임기가 긴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 자기 선거이면 차라리 정치적 명제를 내걸고 정면승부라고 하지…. 자기 선거가 아닌 당 선거를 갖고 하게 되면 정책 심판도 받지 못하고 이미지 싸움을 하게 된다."

이어 아주 결정적인 발언이 터져 나왔다. 노 대통령이 "평가와 심판은 한꺼번에 모아서 진퇴로 결정하는 것이 제일 좋은 것 같다"고 말한 것이다. 기자들의 심증이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같이 치르는 개헌(예를 들어 4년 중임제)을 염두에 두고 있구나'하고 추론한 것.

이미 노 대통령은 지난 2002년 대선 당시 "2008년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가 일치되는 것을 계기로 대통령과 국회의원 임기를 일원화시켜서 잦은 선거로 인한 국력낭비를 최소화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당연히 기자들은 "개헌을 염두에 두고 한 말 아니냐"고 캐물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개헌은 이미 대통령의 소관이나 역량범위를 떠났다"며 개헌추진 가능성을 일축했다.

이어 노 대통령은 "대통령이 개헌을 끄집어내서 추진할 상황은 아닌 것 같다"며 "되지도 않을 일 가지고 평지풍파 일으킬 일이 아니라 벌여놓은 일이나 잘 마무리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나"라고 보기 드물게 방어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노 대통령은 "3년간 대통령 하면서 하나 깨우친 게 있다면, 헌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치문화라는 것"이라며 "그동안의 경험으로 보자면 헌법제도가 가장 중요하거나 가장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기자들이 대통령의 임기와 관련된 자신의 발언을 계속 개헌론으로 해석하자 3년간의 성찰까지 동원하며 강하게 부인하고 나선 것이다.

비서실장까지 내려와 개헌론 진화... 과연 언론만 잘못일까?

a "대통령 임기 5년은 길다"는 노 대통령의 발언은 '개헌론' 등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대통령 임기 5년은 길다"는 노 대통령의 발언은 '개헌론' 등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 청와대 제공

노 대통령은 하산한 뒤 기자들과 오찬을 함께 하면서 "제가 산에서 대통령 임기 5년이 길다고 했더니 내려오는 길에 우리 비서관이 개헌하자는 뜻으로 오해될 우려가 있다고 했다"며 "결코 그런 뜻이 아니다"라고 거듭 해명했다.

하지만 오찬이 끝난 뒤 춘추관에 도착한 기자들은 "대통령 임기 5년은 길다"라는 노 대통령의 발언을 제목으로 뽑고, 이를 개헌론과 결부시키는 기사를 타전하기 시작했다.

이에 김만수 대변인이 두 차례나 기자실에 들러 "개헌론과 전혀 상관없다"고 해명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이병완 비서실장까지 오후 6시 30분경 기자실에 들러 "노 대통령의 발언에는 개헌과 연결된 1%의 의도도 없었다"고 확대해석 자제를 주문했다.

이 실장은 "양극화와 FTA, 저출산·고령화 문제 등 미래 문제의 해결을 위해 개헌문제를 꺼내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대통령의 평소 생각"이라며 "임기가 길게 느껴진다라는 말씀은 임기 3년의 소회를 말씀하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에 대해 양정철 비서관은 27일 "한 가지 표현을 두고 당일 대통령이 두 번, 비서실장이 또 한 번 직접 보충설명을 하는 경우는 대단히 이례적"이라며 "청와대로서는 할 수 있는 성의를 다했지만 모두 소용없었다"고 지적했다.

양 비서관은 "이번 경우는 언론 스스로 만들어낸 의제에 스스로 빠져들고 이를 바탕으로 의제를 키운 전형적 자가발전 보도"라며 "모호한 표현의 해석을 둘러싼 논란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신뢰의 문제"라고 꼬집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발언은 개헌론으로 해석하기 좋은 요소들을 갖추고 있었다. "5년 임기는 긴 것 같다" "중간에 자주 선거가 끼어들어 국정이 자꾸 흔들린다" "평가와 심판은 한꺼번에 모아서 딱 진퇴를 결정하는 것이 제일 좋다" 등은 개헌을 떠올리지 않으면 그 진의를 제대로 짚어내기 힘든 발언들이다.

게다가 "임기 3년의 소회를 말씀하신 것"이라는 이병완 실장의 해명도 노 대통령의 설명과는 딴판이다. 노 대통령은 산상간담회에서 "대통령의 임기 5년은 긴 것 같다"는 발언을 한 뒤 "이것은 개인적 소회라기보다 제도적으로 5년이라는 세월이 좀 긴 것 같다"고 설명했다. 즉 제도적 측면에서 접근한 발언이라는 것이다.

사실 기자는 "헌법보다 정치문화가 중요하다"는 발언에 착안해, 노 대통령이 개헌보다는 지방선거 전에 탈당하고 '제2의 연정'이라도 추진해 양극화 해소 등 국가적 미래과제를 해결해가는 모습을 상상하기도 했다. 물론 이것이 청와대에게 "정부와 언론의 신뢰관계"를 깰 수 있는 '소설'로 보이겠지만….

여하튼 노 대통령의 산행 발언의 해석을 둘러싼 논란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노 대통령의 입이 기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한 것만은 분명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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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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