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독도 침탈 기도에 맞서, 우리 정부가 국민적 여론을 바탕으로 종래의 '조용한 대응'에서 '강경한 대응'으로 기조를 바꿔 가고 있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고 또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더욱더 중요한 것은, 우리 정부가 이러한 기조에서 이탈하지 않고 독도에 대한 주권적 대응을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가는 일일 것이다.
우리가 일본에 대해 무기력한 대응을 할 경우에 일본이 어떤 태도로 나올 것인가는, 1899년 당시 일본인들의 울릉도 침탈 사례를 통해서도 절실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 점을 위해 2005년 10월 한일관계사학회(회장, 연민수 전 부산대 연구교수)가 발행한 <한일관계사연구> 제23집에 실린 <메이지 정권과 독도>라는 논문의 일부를 소개하기로 한다. 현명철씨가 집필한 이 논문에는, 청일전쟁 이후 일본인들의 울릉도 침탈 실태가 소개되어 있다.
문제의 발단은 이러하다. 아관파천(1896년) 이후 일본과 공동으로 한반도를 장악하게 된 러시아는 조선정부로부터 울릉도 삼림 벌채권을 확보했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울릉도에서 무단으로 산림을 벌채하자, 러시아 서리공사는 일본에게 직접 항의하지 않고 1899년 대한제국 외부(외교부)에 항의서한을 보내왔다. 이에 따라 배계주가 울릉도 도감으로 임명되어 일본인들의 침입실태를 조사했는데, 그가 올린 보고서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일본인 수백 명이 촌락을 만들어 배를 이용하여 목재를 계속 유출하고 있으며, 곡식과 물화를 몰래 들여와 교역을 하는데 그들의 뜻을 거스르면 창칼을 들고 마음대로 폭력을 휘둘러서 주민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안도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 계속되고 있다."
-울릉도 도감 배계주가 일본인들의 울릉도 삼림 침탈에 관해 정부에 올린 보고서의 번역문
이에 따르면, 일본인들 수백 명이 울릉도에서 아예 촌락을 만들어 살고 있었으며, 삼림을 무단으로 벌채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창·칼까지 동원하여 한국 주민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여러 차례의 진상조사가 더 진행된 후인 1900년에 대한제국은 일본공사관에 '일본인 쇄환'을 요구했다. 다시 말해, 울릉도 거주 일본인들을 소환해 갈 것을 일본정부에 요구한 것이다.
대한제국정부가 경찰력을 동원해 일본인들을 직접 몰아낸 게 아니라 일본정부에게 일본인들을 데려가도록 '부탁'을 했던 것이다. 당시 일본의 위세가 대단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측면도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지나치게 무기력한 대응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엄연히 대한제국의 주권이 살아 있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이 같은 대한제국의 대응은 분명 직무유기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일본정부의 반응도 참으로 '가관'이다. 1900년 9월 일본정부의 회답문은 이러하다.
"일본인이 울릉도 재류는 도감이 묵허하고 종용하였기 때문이다. 도벌은 없었고 도감의 의뢰나 합의 매매이며, 상업과 무역은 도민의 희망에 따른 것일 뿐이며, 도감이 장차 수출입세를 징수할 예정인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일본인 거류는 울릉도민에게 교통의 편리를 제공하고 있다."
-울릉동 삼림 벌채에 대한 대한제국의 항의에 대한 1900년 9월 일본정부의 회답문 번역문.
이에 따르면, 일본 측은 자신들 도벌을 한 게 아니라 매매했다고 강변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거류한 덕분에 울릉도민들의 교통의 편의를 누리고 있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자국민들의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데려갈 생각은 더더욱 없었던 것이다. 도리어 자신들로 인해 울릉도 사람들이 덕을 보고 있다는 엉뚱한 주장까지 늘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이에 대해 대한제국정부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대응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물론 아니다. '약간' 하긴 했다. 그런데 그 대응의 내용이라는 것이, 1900년 10월 칙령으로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한 것과, 1901년 울릉도에 학교를 설립한 것 등이었다. 문제의 본질은, 울릉도에서 일본인들을 몰아내는 것이었음에도, 울릉도를 개칭하고 거기에 학교를 세우는 등의 '다소 엉뚱한 대응'에 그쳤던 것이다.
대한제국의 이 같은 '조용한 대응'을 보고 일본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한국인들의 '점잖음'에 찬사를 보냈을까? 당연히 아니다. 도리어 그들은 1902년 3월에는 4명의 일본 경찰을 보내 울릉도에 상주시키기까지 했다. 뒤이어 1905년에는 시마네현 고시를 통해 독도를 자국 영토에 편입시키기도 했다.
이처럼 대한제국의 '조용한 대응'은 일본의 '강경한 도발'을 초래하고, 결국에는 울릉도뿐만 아니라 독도 나아가서는 나라 자체를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 볼 때, 우리가 이번에 독도에서 밀리면 최악의 경우에는 '그보다 더 큰 것'까지 위협당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그러므로 '더 큰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번에는 반드시 강경한 대응을 보여줘야 한다.
우리가 '강경한 대응'을 보이면, 일본은 '조용한 도발'로 선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국민적 단결을 바탕으로 '더 강한 대응'을 보이면, 일본은 독도와 동해에 대한 자신들의 야욕을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뉴스 615>에도 동시에 실리는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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