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동해 배타적 경제수역(EEZ) 탐사 계획으로 촉발된 한·일 간 외교분쟁을 논의하기 위해 유명환 외교통상부 제1차관과 야치 쇼타로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이 서울에서 협상을 벌이고 있다.
아소 다로 일본 외상이 밝힌 바 있듯 일본측의 요구 조건은 '한국이 오는 6월 국제수로기구(IHO)에 독도 인근 지형에 대한 한국식 지명신청을 하지 않으면 일본도 EEZ 탐사계획을 철회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차관은 "우리는 관련 데이터를 준비 중이며 6월에 등재신청을 하겠다고 발표한 적이 없다"며 지명신청을 6월 이후로 미룰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유 차관의 표현대로 일본이 '오버 액션'을 하는 것이든 아니든 간에 만약 이번에 한국이 일본에게 "6월 해저 지명 신청을 미루겠다"고 말하면 이는 일본에 백기를 드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백기를 든다는 건 무슨 뜻인가?
지금 중요한 것은 한국정부가 6월 지명신청을 준비하고 있었느냐 아니냐가 아니다. 문제는 일본이 6월 지명 신청의 포기 여부를 협상의 의제로 내걸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한국은 일본의 요구에 따라 협상을 수락했다. 그리고 양국은 6월 지명신청을 놓고 협상을 벌이고 있다.
6월 지명신청을 준비하고 있었든 아니든 간에, 한국이 일본측의 협상 요구를 수락하고 나아가 일본이 깔아놓은 협상의제에 따라 협상을 시작함으로서 결과적으로 6월 지명신청을 그동안 준비해 왔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한국이 일본에게 6월 지명신청을 연기하겠다고 약속하고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일본이 EEZ 탐사계획을 철회하면 한국이 일본의 도발 앞에서 백기 투항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다.
한국이 처음부터 6월 지명신청을 의도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의제로 협상에 임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협상이 없는 상태에서 6월에 지명신청을 하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지금 같은 협상이 벌어진 상태에서 6월에 지명신청을 하지 않으면 한국이 일본에 무릎을 꿇는 격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협상의 의제를 설정함에 있어 한국은 일본에게 '속아 넘어간' 것이다. 협상 수락 그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상대방이 '6월 지명신청 연기'를 협상의제로 내건 상태에서 협상을 수락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측이 제시한 조건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거기에도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이 6월에 지명신청을 하지 않으면 일본이 탐사계획을 철회한다'는 조건은 처음부터 한국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한국이 6월에 지명신청을 하는 것은 얼마든지 실현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한국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이 6월에 지명신청을 하지 않는 것은 일본에게 득이 된다.
한편, 일본이 독도 주변 수역을 탐사하는 것은 실현되기 힘든 것이다. 한국정부가 해경 등을 내세워 주권적 대응만 제대로 하면 일본의 탐사계획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이 탐사계획을 철회하는 것은 한국에게는 실질적인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일본이 탐사계획을 철회하지 않더라도 그 탐사 자체가 실현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일본의 탐사계획은 어차피 철회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일본이 한국에 주겠다고 약속한 선물인 '탐사 계획 철회'는 한국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일본으로부터 굳이 선사 받지 않더라도, 한국이 주권적 대응만 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정리하면 한국이 일본에 줄 수 있는 선물은 '실현 가능한 실질적 선물'이지만 일본이 한국에 주겠다고 한 선물은 '실현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한국이 받을 필요도 없는 선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외교통상부가 초기 협상에서 일본에 졌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상대방이 제시한 협상조건을 좀 더 면밀히 관찰하지 못한 잘못이 있다.
그러나 아직 방법은 남아 있다. 한국이 "6월 지명신청을 미루겠다"는 말을 안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은 이번 협상에서 실패하게 된다.
사실 애초부터 우리가 우리 영토에 대해 이름을 붙이는 것을 두고 일본과 협상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독도는 한일관계의 상위개념이라고 말했듯이 독도 인근 지형에 대해 지명을 붙이는 것도 한일관계의 상위인 주권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6월에 지명신청 하는 길밖에 없다
그래서 이번 협상은 처음부터 잘못된 협상이다. 하지만, 이왕에 협상을 시작한 이상 협상을 승리로 이끄는 수밖에 없다. 이제 한국에게 남은 것은 6월에 지명신청을 하는 길밖에 없다. 한국이 처음부터 그것을 준비했든 안했든 간에 지금 진행되는 협상에서 지지 않으려면 6월에 지명신청을 하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6월에 지명신청을 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지명신청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번이 아니더라도 일본은 한국의 지명신청을 계속해서 방해할 것이다. 지명신청을 둘러싼 한·일 대립은 한번은 꼭 넘어야 할 산인 것이다. 지금 피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일단 지금으로서는 그 '산'을 넘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6월에 지명신청을 하게 되면 일본의 도발이 더 거세지겠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더 비장한 각오로 일본에 맞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지켜 내면 된다. 우리가 피하면 일본의 도발은 더 거세질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점들을 볼 때, 이제 한국정부는 6월 지명신청을 기정사실화하는 수밖에 없다. 협상의 초기 단계에서는 일본에게 속았지만, 최종적 결과만큼은 우리의 승리가 되도록 해야 한다. 만약 집권 여당이 이번에 또 국민을 배신한다면 ▲5·31 지방선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2007년 대통령선거 등 주요 고비마다 엄혹한 국민의 심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뉴스 615>에도 동시에 실리는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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