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419회

등록 2006.04.27 08:13수정 2006.04.27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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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렴의 얼굴에 얼핏 실망과 비웃음이 떠올랐다. 동시에 그는 별로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우수를 들어 손가락을 빠르게 튕겨냈다.

파지지직-----!


그의 다섯 손가락에서 귀화(鬼火)처럼 보이는 푸른 불꽃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허공에서 폭죽이 터지듯 연달아 불꽃을 피워 올렸는데 구효기는 깜짝 놀라며 공격해 가던 동작을 멈췄다.

“귀(鬼)....염지(燄指).......?”

백렴의 진신무공은 사부인 화권금장(火拳金掌) 악조량(岳操梁)으로부터 전수받은 금강장(金剛掌)과 화홍권(火灴拳)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의 손에서 펼쳐진 것은 괴이한 지공이었던 것이다. 경악스런 귀염지란 말과 함께 구효기는 절망스런 기색을 띠며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왔다. 누구가의 입에서 경악스런 기색이 섞인 탄식이 흘렀다.

“귀곡(鬼谷)........!”

서늘한 느낌이 좌중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귀염지는 귀곡의 세 가지 무공 중 하나다. 그것이 백렴의 손에서 펼쳐졌음은 백렴이 귀곡의 문하임을 의미했다. 백렴은 정중하게 담천의를 향해 포권을 위했다.


“속하로서는 우선 영주께 죄송스럽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겠소. 치죄를 한다면 달게 받겠소.”

귀염지를 사용한 것은 귀곡의 문하임을 명백히 밝힌 것이다. 그럼에도 치죄를 달게 받겠다는 의미는 아직 균대위 소속의 일원이라는 뜻이었고 배반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있겠소?”

담천의의 나직한 물음에 백렴은 구효기를 한번 쳐다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의 의미는 자신의 입을 막는다면 이번엔 단지 막는 것으로 그치지 않겠다는 의미가 농후했다.

“속하는 두 분의 사부를 모셨소. 처음은 영주께서도 알고 있다시피 화권금장(火拳金掌)이라는 분이오. 우연히 그 분외에 또 한 분의 사부를 모시게 되었는데, 바로 여러분들이 알고 계시는 귀진자 어른이시오.”

귀진자의 또 다른 제자. 그가 바로 백렴이었다니.....

“사실 보잘것없는 제가 사부로 모시기에는 너무 큰 뜻을 가지신 어른이라 한 번도 사부라 불러보지 못했소. 그저 거두어 주신 것으로 감사했고, 그 어른의 수발이라도 들어 드릴 수 있다면 모든 것을 접고 그 분 곁에 있어도 좋다는 생각을 했소.”

균대위가 해체되다시피 하고, 부상을 당한 악조량이 병석에 누워 있게 되자 백렴은 방황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악조량 역시 ‘방관’이란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으니 제자가 그 감정을 이입(移入)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그에게는 또 하나의 선택을 강요받고 있었다.

“속하는 당시 이미 비원(秘苑)에 속해있던 조국명으로부터 비원에 가입하도록 명령 아닌 강요를 받고 있었소.”

거의 친형이나 다름없던 조국명으로부터의 강요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아예 균대위 뿐 아니라 무림을 떠난다면 간단한 일이었겠지만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동안 비원에서 균대위에 남은 인물들을 포섭해 왔기 때문에 자연스런 일일 수도 있었다.

“네...네 놈이 정녕 본원을 배신하려 하는 것이냐?”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당장이라도 백렴의 입을 틀어막겠다는 구효기의 위협적인 말이었다. 그 말에 담천의는 시선을 홱 돌리며 나직이 말을 뱉었다.

“분명히 경고하겠소. 만약 앞으로 한마디만 더 한다면 당신은 영원히 말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오.”

그의 시선에서 쏘아지는 정광은 마치 구효기의 동공 속을 파고 들어가 온 몸을 마비시키는 것 같았다. 그의 전신에서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류는 주위 사람들에게 질식할 것 같은 압박감을 주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저 한 시대의 풍운아로 보았던 담천의의 실체를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백렴에게 돌아가자 그제 서야 구효기와 주위사람들은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 분은 제가 비원에 가입하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이란 말씀을 해주셨소. 어느 곳에 있으나 사람의 본분을 잃지 않으면 할 일이 있을 것이라며 주위 상황에 역행하지 말라고 하셨소. 그리고 얼마 전 제가 할 일을 주셨소.”

백렴은 구효기를 가리켰다.

“저 분은 비원의 삼대통수 중 좌통수를 맡고 계신 분이오. 제마척사맹을 조직하고 이곳에 들어 온 목적은 오직 하나요. 무림문파나 무림인들을 이용해 이곳 천마곡의 세력과 끝까지 상잔하도록 하는 것. 아마 구거사는 천마곡의 입구가 막혔을 때 누구보다 열렬히 환호했을 것이오.”

구효기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같은 조직의 동료이자 수하가 모든 것을 발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곳에 있는 좌중은 그가 말했던 ‘옥쇄(玉碎)’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감지했을 것이다.

두 세력이 서로 상잔하고, 이곳에서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가 중원 무림인들을 충동해 제마척사맹을 만들고 천마곡에 들어 온 목적이었다. 그것이 비원에서 그에게 내려진 임무였다.

“그 어른께서는 제게 이곳에서 더 이상 쓸모없는 살상과 희생이 일어나지 않도록 부탁하셨소. 그것이 제가 이곳에 들어오려고 했던 이유요.”

귀진자는 이렇게 황실과 반황실 간의 세력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안배했다. 어느 시대나 어느 곳이나 다툼과 갈등은 존재한다. 인간의 권력에 대한 열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것은 계속된다. 그것을 미리 방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기존의 가치와 권력을 옹호하는 것도 옳은 일이 아니다.

“이제야 사부님의 뜻을 알았소. 갈등과 분란 속에서 연관 없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원치 않으셨던 것이오. 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이 권력을 쥐기 위하여 빼앗고 뺏기는 다툼에 다른 많은 사람들을 이용하려는 것이오? 그럴듯한 명분을 앞세워 왜 많은 사람들의 피를 강요하는 것이오?”

좌중은 말이 없었다. 바로 이것이다. 이상한 것이 권력을 쟁취하려는 자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대중을 이용한다. 대중의 이름을 팔고 들먹인다. 마치 자신의 감춰진 의도가 대중이 원하는 것인 양 포장한다. 누군가를 시켜 선동하고 그 의도를 모르는 대중을 끌어들인다. 그리고는 흥분한 그들 뒤에서 지긋이 웃고만 있다.

“아예 움직일 수 없는 중상자는 속하가 맡겠소. 최소 자신의 몸을 다른 분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인원만 데리고 나가시오. 움직일 수 없는 환자를 억지로 데리고 나가는 것은 양쪽 다 좋은 결과를 얻기 어렵소.”

말하는 백렴은 아주 편안한 얼굴이었다. 모든 것을 밝히고 나니 마음이 편해진 모습이었다. 사부가 자신에게 원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희생하면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아낄 수 있다.

“백위장은 이곳에 남아 죽겠다는 말이오?”

담천의가 탄식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이곳에 남는다는 것은 곧 중상자들과 함께 죽겠다는 의미다.

“어차피 나가다 죽는 것이나 이 안에서 죽는 것이나 뭐 다를 바 있겠소? 나가다가 죽지 않으리란 법이 있소? 중상을 입은 분들 중에는 자칫 움직이면 태반이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높소. 더구나 이곳 중상자들을 죽인다 해서 저들도 무슨 이득이 있겠소? 만약 이곳을 무사히 빠져 나간다면 잊지나 말고 나중에 거두어 주시오. 그 때까지 살아남아 있을 인원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너무나 담담하게 말하는 백렴의 태도에 좌중은 할 말을 잃었고, 분위기가 숙연해 졌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이란 말은 쉬어도 그것을 실행하기는 어렵다. 간혹 그런 상황이 오면 어쩔 수 없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런 상황이 온다 해도 실천할 사람은 거의 없는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희생을 줄일 수 있다면 계획한 데로 실행해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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