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마저 뒤덮으려는 '계엄의 망령'

[김종배의 뉴스가이드] 엄벌주의 도입하면 일벌이 백계로 이어질까

등록 2006.05.24 11:33수정 2006.06.09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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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식 엄벌주의 도입을 기사화한 24일자 <중앙일보> 기사.


그렇지 않아도 당혹스러웠다. 학교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사고가 잇따라 터져 "어떻게 해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었다.

이러던 차에 <중앙일보>와 <한국일보>가 '무관용'을 화두로 던졌다. 일본이 초·중학교에 미국식 엄벌주의, 일명 'zero tolerance'를 도입키로 했다는 소식을 각각 1면과 2면에 배치했다.

내용은 이런 것이다. 일본 초·중·고교 학생 폭력행위가 98년 이후 매년 3만 건 가량 발생하고 있는데도 의무교육이 실시되는 초·중학교에서는 정학이나 퇴학 조치를 내릴 수 없다. 고민하던 일본 교육당국은 급기야 단계적으로 벌칙을 높이고 최종적으로는 출석정지제도를 적극 활용할 것을 권고했다. 이 엄벌주의는 사소한 규칙 위반도 엄하게 다스리는 지도방침으로,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미국 전역에서 실시된 제도다.

엄벌주의를 전한 두 신문의 태도는 매우 조심스럽다. 찬반 의견을 균형감 있게 소개하는 것으로 기사를 마무리 했다. 따라서 두 신문이 엄벌주의를 한국 학교 폭력사태의 해결대안으로 제시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래도 참고사항을 던진 것만은 분명하다.

던졌으니 받자. 엄벌주의는 타당한가?

교육과 징계가 서로를 배척하는 건 아니다. 옛날부터 '일벌백계'가 교육의 한 방편으로 통용돼 온 사실도 있다. 따라서 엄벌주의를 무조건 백안시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권위다. 모든 구성원이 깨끗이 승복할 수 있는 권위를 확립하는 게 관건이다. 징계가 자의적 판단이나 감정·상황에 휩쓸려 내려진 것이 아니며, 학칙에 따라 공정하게 취해진 것임을 인정하도록 하는 게 관건이다.

아직도 수두룩한 비현실적·작위적 학칙

그럼 이런 현실은 어떻게 봐야 할까? <경향신문>이 지난 3월 보도한 바에 따르면 전국 중·고교 학칙에 비민주적이고 비현실적인 조항이 수두룩하다고 한다. 충남 보령의 대천여고는 주번에게 전교생의 생활동태를 파악하도록 하고 있고, 서울 서문여고는 "불온문서를 은닉·탐독·제작·게시·유포하거나 백지동맹을 주장한 자를 퇴학 처분할 수 있다"는 규정을 두고 있다.

이런 경우가 '희귀 사례'에 해당한다면 이건 어떨까? 상당수 학교가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에도 없는 '정치에 관여하거나 집단행동으로 수업을 방해하는 행위' '학력이 열등하여 학업 이수의 가망이 없다고 인정된 자' 등의 징계를 규정하고 있다. 국가인권위가 '인권 침해'로 결론 내린 두발제한 규정을 끝끝내 고집하는 학교가 수두룩한 사례도 있다.

열거한 사례 대부분은 학교 폭력과 관련이 없다. 그래서 범주가 다른 얘기로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니다. 원인 없는 결과 없듯이, 갈등 없는 폭력도 없다. 비현실적이고 작위적인 학칙이 갈등을 유발하는 게 문제다.

물론 손 놓고 있는 건 아니다. 교육부는 2003년부터 학교 자체적으로 민주적인 학생생활규정을 개정·시행토록 유도하고 있고, 일부 교육청은 실제로 행동에 나서고 있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다. 기다려봄직 하다. 하지만, 그래도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

최순영 민주노동당 의원이 지난 23일 발표한 '전국 128개 대학 징계규정 보고서'가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대상 대학 중 62%가 징계대상자가 직접 소명하는 절차 없이 징계를 결정하고 있다. 또 87%의 대학이 징계를 재심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지난 4월에 학교측으로부터 '출교' 조치를 당한 고려대생 7명도 이런 이유 때문에 이의제기를 못 하고 있다.

이 자료는 학교측이 '무소불위급' 징계권한을 휘두르고 있음을 방증한다. 아울러, 징계 조치가 미흡해 학교에서 불미스런 일이 발생한다는 주장에 맞서는 지렛대로서도 손색이 없다.

성에 차지 않는 교육부, 이번엔 공권력까지?

그런데도 교육부는 성에 차지 않았나 보다. 며칠 전 교사에 대한 협박·폭언·폭행이 있을 경우 즉각 사법당국에 고발하라고 했다. 일방통행식 학칙에 무소불위급 징계권한으로도 모자라 학교 밖 공권력의 힘까지 빌리라는 지시다.

이중삼중의 울타리를 쳐놓은 상태인데 여기에다가 미국식 엄벌주의까지 덧입힌다고 가정해 보자. 학교는 어떻게 될까? '준 계엄상태'라고 표현하면 과한 걸까?

백번 양보하자. 그렇게 해서라도 학교 폭력이 '발본색원'될 수 있다면 판단을 조금 바꿀 여지도 있다. '일벌백계' 차원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발본색원' 될까? 고려대 유헌창 교수 등 5명의 교수는 제자 7명을 '출교'해버린 학교당국을 향해 이렇게 주장한 바 있다. "학생들이 징계를 내면적으로 받아들여야 교육적인 효과가 있다."

고려대 교수의 이런 충고를 접하니 새삼 떠오르는 사실들이 있다. 최근 발생한 학교폭력 사건 가운데 일부는 '집단 대응' 성격을 띠고 있었다. 경위야 어떻든 폭행을 행사하는 동급생을 수수방관 지켜보거나, 학교의 징계 시도에 집단 반발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는 뭘 뜻하는가? '일벌'이 '백계'로 이어지지 못하는 우리의 교육현실을 보여준다.

집중 모색해야 하는 건 엄벌주의와 같은 외과적 처방이 아니다. '일벌'이 '백계'로 이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문제만 더 키우는 원인, 즉 학교현장의 구조적인 문제를 파헤치는 것이다.

너무 평범한 사실이지만, 제도는 단지 씨앗에 불과하다는 점을 새삼 확인할 필요가 있다. 더 중요한 것은 토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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