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의 '만종' 속 주인공이 됐습니다

아내와 콩밭에서 누린 평화... 콩 심은 데 콩 나겠지요?

등록 2006.06.20 16:50수정 2006.06.2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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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맨발에 닿는 흙의 느낌이 아주 좋습니다.

맨발에 닿는 흙의 느낌이 아주 좋습니다. ⓒ 송성영

"거기다 심어봤잖디…."


아내와 함께 땡볕 아래에서 부지런히 콩을 심고 있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한마디 툭 던졌습니다. 비둘기나 까치들이 알게 되면 콩 싹이 다 크기도 전에 작살이 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맥이 빠졌습니다.

'어이 씨, 남이야 심든 말든, 싹도 나오기 전에 염장 지르고 지랄여' 라고 내질러 주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지나가던 양반' 딴엔 걱정이 돼서 한 소리였으니까요.

"비둘기떼들이 냄새 맡으믄 콩 열 개에 일곱 개는 발라먹을 틴디."
"그렇다네유, 그래두 그냥 심는규, 날짐승들이 먹겠다는디 워쩌겠슈."

계룡산 연천봉이 훤히 올려다 보이는 곳에 500평의 밭이 새로 생겼습니다. 땅 한 평 없는 우리가 드디어 땅을 장만한 것은 아니고요. 공주에서 장사를 하는 '아는 후배'가 갈아먹으라고 고맙게 내놓은 땅입니다.

이제 우리 집 뒤편 산비탈 야채밭과 합치면 대략 천 평 가까운 농사를 짓고 있는 셈이니 어디 가서 농사짓는다고 큰소리 빵빵 쳐도 될 것 같습니다.

a 계룡산 연천봉이 올려다 보이는 곳에 500평의 밭을 새로 얻었습니다.

계룡산 연천봉이 올려다 보이는 곳에 500평의 밭을 새로 얻었습니다. ⓒ 송성영

메주나 청국장을 쑤어 야채와 함께 내다 팔고 있기에 대량으로 재배할 콩밭이 필요했었습니다. 거기다 소작료를 내지 않는 밭이었기에 군침이 돌았습니다. 하지만 결정하는 데는 쉽지 않았습니다.


우리 집에서 후배네 밭까지 자동차로 10분 거리, 거기다가 500평이 한 덩이로 툭하니 터져 있어 보기만 해도 기가 질렸습니다. 직사각형의 밭 끝에 앉아 반대 쪽 밭 끝을 보고 있으면 까마득했습니다. 하루에 몇 십 평씩 밭을 갈던 느려터진 인간이 한꺼번에 500평을 감당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풀숲을 이룬 밭을 농기계를 가진 동네 사람에게 10만원을 주고 경운 해놓고 보니 더욱 아득하기만 했습니다. 사나흘 사이에 몰려온다는 장마 때문에 하루 이틀 사이에 콩을 다 심어야 했는데 일손 거들어 주겠다며 큰소리 땅땅 치던 글쟁이 후배는 때마침 방송원고 마감 때문에 날밤 지새우랴 정신이 없었습니다.


결국 힘든 밭일만큼은 절대로 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아내의 일손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a 아내와 함께 땡볕에서 콩을 심는데 심어도 심어도 끝이 없습니다.

아내와 함께 땡볕에서 콩을 심는데 심어도 심어도 끝이 없습니다. ⓒ 송성영

"어휴, 이 땡볕에, 이따가 해 떨어지고 심으시지. 더위 먹으면 큰일 나요."

밭 옆에 살고 있는 유정이네 엄마가 시원한 냉차를 가지고 오며 걱정이었습니다. 유정이네 엄마 말대로 주변을 둘러보니 논이며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너른 들녘에 우리 부부뿐이었습니다.

"인저 인효 엄마는 저기 그늘 밑에 가서 쉬고 있어, 내가 후딱 끝낼테니께."
"아직도 까마득하구먼, 걱정 말구 콩이나 넣어, 근데 우리 일하는 게 바뀐 거 아녀?"

그러고 보니 콩을 넣는 간단한 일은 내가 하고 있었고 괭이로 콩 넣을 자리를 만드는 힘든 일을 아내가 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바꿔서 하자."
"아니, 그냥 해, 나는 이게 더 편해."

내 뒤에 서면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왜소한 체구의 아내였지만 일하는 데는 언제나 나보다 한 수 위였습니다.

우리는 잠시 땡볕을 피해 땀으로 범벅된 몸을 이끌고 계룡산 신원사 근처에 있는 무지무지 하게 맛있는 모밀 냉면 한 사발에 사리까지 추가로 먹고 와서 다시 콩을 넣었습니다.

시원한 냉면으로 잠시 식었던 몸은 다시 땀범벅이 되었습니다. 내가 밭고랑을 만들어 놓으면 아내는 콩을 넣고, 아내가 밭고랑을 만들면 내가 콩을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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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성영

땀으로 온몸이 축축해질 무렵 시원한 바람과 함께 저만치 서쪽 산자락으로 해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허리를 펴고 부지런히 콩을 놓고 있는 흰옷을 입은 아내가 옅은 노을빛에 물들고 있었습니다.

군소리 없이 땀 흘리고 있는 아내는 노을빛보다 아름다웠습니다. 문득 밀레의 '만종'을 떠올리고 있는데 아내가 한마디 툭 던집니다.

"우리가 이러고 있으니까 밀레의 만종 같네."
"나도 금방 그 생각 했는디."

아직도 까마득하게 남은 콩밭 한 가운데서 나는 느끼한 표정으로 아내 옆에 다가가 밀레의 '만종' 그림처럼 고개를 숙여 보았습니다. 고개 숙인 콩밭 저만치로 그 모든 평화처럼 하루가 기울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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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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