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26회

등록 2006.09.05 08:17수정 2006.09.05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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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 무림인들이 보주에게 고개를 숙이듯 중원상인들은 상만천에게 고개를 숙이니까…. 더구나 무림보다 더 치열한 곳이 상계라 할 수 있다네. 무림에서는 상대에게 패했을 때 자신만 죽으면 되지. 하지만 상계에서는 패했을 때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는 거야. 빈털터리가 되어 스스로 죽지 않으면 남의 집 종이 되어야하는 거지. 가족 모두가 말이야. 아니면 빚 때문에 평생 쫓겨 다녀야 하거나."

"그럴 수도 있겠군."


두 번째 내리는 물건은 아마 식자재인 모양이었다. 숙수(熟手)로 보이는 다섯 명의 인물들이 등에 한보따리씩 물건을 지고 내리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 열명 정도 되는 남녀가 엄청난 양의 음식 재료를 들어 나르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매우 어수선해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매우 효율적이고 빠르게 나르고 있었다.

더구나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 뒤로 살아있는 소와 돼지, 양은 물론이고, 오리와 닭까지 줄줄이 몰아 내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돼지의 꽤액 거리는 소리가 위에서도 들리고 있었다.

"상만천이란 인물은 정말 웃기는 작자로군. 딸린 식구들이 많아 임시 거처를 만들려는 의도는 그래도 봐주겠어. 회갑연에 오면서 저런 것은 왜 가지고 오는 게야. 자신이 회갑연이라도 차려주려는 건가?"

함곡이 피식 웃었다. 풍철한은 상만천에 대해 모르는 것이 틀림없었다.

"자네 상만천이란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들어는 보았나?"


"별로 본 사람이 없다고 하더군."

"그는 사람들 앞에 나타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네. 찾아 온 손님도 자신이 직접 만나주는 적이 거의 없어. 그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은 가족을 제외한다면 아마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걸세."


"자네는 만나 보았나?"

"한번 본 적이 있지. 하지만 상만천은 나를 기억하지 못할 걸세."

함곡은 쓴 웃음을 지었다. 과거 언젠가 상만천을 만난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금방 머리를 흔들어 기억을 지워버렸다.

"저 자의 주위 삼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 또한 몇 되지 않지. 하지만 의외더군. 그는 비단옷보다는 마의(麻衣)를 즐겨 입는다네."

"원래 부자가 더 지독하다하지 않은가?"

"그는 본래 그런 사람이라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만든 집이 아니면 자지를 않고, 자신의 숙수가 만든 음식이 아니면 먹지를 않네. 자신이 직접 고른 여자가 아니면 같이 자지도 않지."

"왜?"

"그는 나이 마흔이 되기 전에 일흔 세 번의 암습을 받았네. 그 중에는 전설적인 살수가 세 명이나 끼어 있었지. 그 뒤로 십년이 지났네. 이제는 세지도 않는다고 하네."

"대단하군. 그럼에도 살아 있다는 것이 놀랍군."

정말이었다. 풍철한 자신이라 해도 일흔세 번의 암습과 그 중 전설적인 살수 세 명이 끼어 있었다면 멀쩡히 살아남을 것이라 장담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놀라운 일이지. 하지만 그런 그가 운중보에 와 며칠을 묵는다는 일은 놀라워도 너무 놀라운 일이라네."

"무슨 뜻인가?"

"그는 황제가 불러도 가지 않을 사람이네. 그는 자신의 영역을 절대 벗어나지 않는 인물이지. 그 영역이란 것이 중원 전체에 걸쳐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지만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곳이 아니라면 가지를 않는 인물일세."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자가 많다면 그럴 수도 있겠군."

"아마 현재 중원을 뒤흔들고 있는 태감 위충현이 불러도 그는 가지 않을 걸세. 물론 위충현이 그를 부르지도 않겠지만 말이야. 헌데 자네는 짐작할 수 있겠나?"

그저 툭 던지듯 한 위충현이 부르지도 않을 것이란 말은 무슨 뜻일까? 하지만 그 의미를 새겨 보기도 전에 함곡의 되물음에 반사적으로 물었다.

"무엇을 말인가?"

"그가 마흔 살까지 일흔 세 번의 암습을 받았다면 자신은 얼마나 많은 살수를 고용해 얼마나 많은 상대를 제거해 나갔을까?"

사람들은 그의 성공만을 부러워한다. 하지만 그가 그만큼 공격을 받았다면 그는 아마 적어도 그 보다 몇 배 더 상대를 공격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공격이 더욱 치명적이어서 그는 살아남아 중원최고의 갑부가 된 것이고, 상대는 싸늘한 시체가 되었거나 죽음보다 더 비참한 삶을 영위하고 있을 것이다.

"상계라는 곳도 생각보다 훨씬 무서운 세계로군."

세 번째 내리는 사람들은 아마 가정(家丁:하인)과 시녀들인 모양이었다. 그들 역시 약 이십여 명 되어 보였는데 그들 역시 탁자와 집기 등을 내리고 있었다. 정말 말 그대로 머물 곳의 모든 것을 분리해서 옮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더구나 이미 먼저 내렸던 자들은 목재를 운중보의 오른쪽 숲 쪽으로 나르기 시작했는데 아마 그 쪽에 집을 지을 모양이었다.

"연무장(鍊武場)에다 자신의 거처를 만들 모양이군."

함곡의 말에 풍철한 역시 고개를 끄떡였다. 위쪽에서 유일하게 내려다보이지 않는 곳이 연무장이었다. 그 터가 넓기도 했지만 손님이 오더라도 수련하는 곳을 볼 수 없도록 만들어 놓은 곳이다. 그런 곳을 택한 것은 정말 탁월한 안목이었다. 상만천은 운중보에 와서도 자신 만의 세계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저 자들이 빨리 거처를 마련한다고 해도 오늘밤에는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에서 자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을 걸세. 아마 해가 떨어지기 전에 상만천은 새로 지어진 자신의 거처에 머물게 될 걸세."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무리 해가 길어졌다고는 하나 앞으로 두 시진 정도네. 그 안에 거처가 마련된단 말인가?"

"가능하지. 아마 저들은 이곳에 오기 전부터 이곳의 지형지물을 파악하고 가장 빨리 거처를 만들기 위해 쉬지 않고 연습을 했을 걸세. 해지기 전에 완성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면 상만천은 아마 오전에 들어오는 배로 이곳에 왔을 걸세."

아무리 함곡의 말이지만 풍철한은 믿기 어려웠다. 집을 짓는다는 것이 무슨 장난인가? 그의 표정을 보고는 함곡이 빙긋이 웃었다.

"나하고 내기를 해도 좋네."

"무슨 연유로 그리 자신하는가?"

그 물음에 언뜻 함곡의 눈에 이채가 스치는 듯했다. 하지만 함곡이 시선을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는 바람에 풍철한은 함곡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했다.

"그에게는 아주 뛰어난 타수가 있네. 용추(龍雛)라고 불리는 자이지."

풍철한도 들은 적이 있었다. 세인들이 봉추(鳳雛) 방통(龐統)의 현신이라고 평가하는 인물이었다. 봉추는 제갈량으로 인해 그 빛을 보지는 못하였지만 제갈량이 유일하게 자신과 버금가는 인물이라고 생각하며 내심 꺼려했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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