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안의 김일성 앞잡이를 숙청하라"

친일파들의 반민특위 전복과정 ②

등록 2006.09.15 11:22수정 2006.09.16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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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진영은 대의명분과 정의심으로 친일청산을 시도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 가혹할 수 없었다. 반면, 친일세력은 개인과 가문의 목숨을 걸고 친일청산에 저항했다. 그래서 그들은 격렬할 수밖에 없었다. 한쪽은 다분히 낭만적으로 접근하고 또 다른 한쪽은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접근했다. 이것은 그동안 친일청산이 번번이 무산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한 가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 글은 해방공간에서 친일파들이 어떤 방법으로 반민특위를 전복했는지에 관한 두 번째 기사다. <필자 주>

3단계 - 국회 압박 : 제헌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起草) 특별위원회'가 구성될 때(1948년 8월 5일)만 해도 '관망'의 태도를 보이던 친일세력은 동년 8월 17일 제42차 국회 본회의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안이 상정되자 '내부 단결'의 단계로 들어갔다. 이때부터 검찰·경찰과 독촉국민회 등에서 집단적인 반대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집단 움직임은 친일파 내부의 단결을 위한 것이었다.

1단계 관망, 2단계 내부 단결에 이어, 친일파들은 3단계 국회 압박에 들어간다. 국회 압박을 통해 그들이 얻고자 한 것은 반민족행위처벌법안(반민법)의 국회 통과를 저지하는 것이었다.

2단계에서 내부적 단결을 강화한 친일세력은 이제 공격의 화살을 국회로 돌렸다. 우선 그들은 법안을 주도하는 국회의원들을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적극적으로 법안 제정을 주도하는 의원들에게는 협박장까지 발송했다. 이러한 정황은 <제헌국회속기록> 제1회 제49호(1948. 8. 26) 및 제50호(1948년 8월 27일)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국회의원들의 숙소와 시내 각처에 불온전단이 뿌려졌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반민족행위자의 처단을 주장하는 사람은 공산당 주구다!""민족을 분열시키는 반민법안을 철회하라!"

친일파들은 대담하게도 국회 본회의장에까지 난입하여 방해활동을 벌였다. 8월 27일 법안 축조심의(조항별 심의)가 진행되는 국회 본회의장의 2층 방청석에서 갑자기 삐라가 살포되었다. 대혁청년단(大革靑年團) 소속의 자칭 '애국청년' 2명이 벌인 행위였다.

8월 28·29일 <조선일보> <자유신문> <조선중앙일보> 보도에 의하면, 그 삐라에는 "친일파를 엄단하자고 주장하는 자는 공산당이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한편, 한민당 지도부는 의원들을 개별적으로 접촉하여, 반민법 제정을 연기시키거나 완화하려는 로비를 벌였다. 한민당에 매월 자금을 제공하던 친일자본가 1명은 "반민법을 무력화시켜 달라"며 거액의 자금을 내놓기도 하였다. 친일파들은 이러한 돈을 지원받아 대지구락부(大地俱樂部)라는 반민법 반대 조직을 결성하였다.

한민당 지도부에 이어 대통령 이승만도 반민법 반대운동에 나섰다. 그는 반민법 제정을 주도하는 국회특별조사위원회(국회특위)를 겨냥하여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지금은 친일문제로 민심을 이산시킬 때가 아니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며 나라에 손해만 될 뿐이다. 그리고 반민법이 제정되어도 시행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국회에서 입법과정에 있는 법안을 두고 행정부의 대통령이 "반민법이 제정되어도 시행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압박을 가한 것이다. 그야말로 삼권분리 정신에 위반되는 담화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승만의 담화문은 친일세력을 고무시키는 효과를 가질 만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국회특위의 활동은 움츠려들지 않았다. 그러자 이에 대한 이승만의 견제도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는 특별담화를 발표하거나 혹은 특위 위원들을 직접 불러 심리적 압박을 가하곤 했다.

이승만과 한민당을 비롯한 친일파들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반민법은 1948년 9월 7일 제59차 국회 본회의에서 결국 통과되었다. 이는 당시의 시대적 요청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승만 "반민족행위자들, 처벌한 시기가 아니다"

반민법이 통과되었지만, 그것으로써 끝이 아니었다. 국회를 통과한 법안은 행정부로 이관되었다. 이제 공은 행정부로 넘어갔다. 그럼, 행정부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반민법이 통과되자, 행정부 공무원들의 동요가 심해졌다. 아니, 동요라기보다는 공포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자 이승만은 공무원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9월 14일 정부 각 부처 간부들을 모아 놓은 자리에서 훈시 한마디를 했다. "지금은 반민족행위자들을 처벌할 시기가 아니다."(1948년 9월 15일자 <조선중앙일보>·<자유신문>)

법률안을 이송 받은 국무원(국무회의 기능)에서는 만장일치로 거부결정을 내렸다. 당시의 국무원은 지금의 국무회의 같은 심의기관이 아니었다. 합의체 의결기관의 성격을 띤 비교적 강력한 기관이었다(제헌헌법 제68조 참조). 이때 국무원의 거부사유는 다음 3가지였다.

첫째,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할 특별재판부의 구성원에 국회의원을 포함하는 것은 삼권분립의 원칙에 위반된다. 둘째, 국회에서 특별재판관을 선출하도록 한 것은 법관의 자격을 법률로 정하도록 한 헌법 규정에 위반된다. 셋째, 일제하에서 특정 직책에 있었음을 이유로 처벌(반민법 제2조·제4조·제5조)하는 것은 "8·15 이전의 악질적 반민족행위를 처벌한다"는 헌법 제101조에 위반된다.

의결기관인 국무원에서 반민법을 거부하기는 했지만, 9월 22일 정부는 결국 반민법을 공포하고 말았다. 정부가 반민법을 거부할 경우 국회가 양곡수매법을 부결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기인하여 할 수 없이 법률을 공포하였던 것이다. 정국 운영을 위한 부득이한 조치였던 것이다. 그러나 뒤에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그들은 공포된 반민법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작업에 들어간다.

지금까지가 3단계에 해당하는 사실관계다. 이 시기에는 친일파들의 공격 목표가 국회에 집중되었으며, 행정부·한민당과 재야 친일단체 등이 그러한 공격을 주도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친일파 청산은 그 당시에도 민족적 과제였지만, 그것을 추진하는 세력이 '확실한 무기'를 장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어딘가 2%가 부족했던 것이다.

검찰·경찰과 행정부에는 여전히 친일세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국가 공권력의 이름으로 친일파를 처단해야 하는데, 그 공권력 안에 친일파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친일파들이 재야에서 강력한 조직을 구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에 대한 사전 견제 없이 국회 입법 과정이 진행되었다. 엄호사격 없이 적진에 뛰어든 것이다.

이 점은 지금의 친일청산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친일청산을 내심 불쾌하게 생각하는 인물들이 여전히 공권력 안에 포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친일청산을 노골적으로 반대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이 언론과 일부 사회단체를 장악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에 대한 아무런 사전 견제장치 없이 친일청산을 진행한다면, 뜻밖의 복병 앞에서 친일청산이 또다시 좌절될 가능성이 없지 않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반민법이 결국 공포되자, 이제 친일파들은 더 이상 국회만을 압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반민법이 국회 밖을 뛰쳐나와 대한민국 영역 안에 퍼지게 되었으므로, 친일파들의 활동무대도 전 대한민국을 무대로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친일파들의 본격적 장외투쟁이 시작된다.

제4단계 - 장외투쟁 : 그동안 국회를 주된 표적으로 삼던 친일파들은 반민법 공포를 계기로 본격적인 장외투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제 그들의 목표는 공포된 반민법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태아를 살해하려던 자들이 그 태아가 출생하자, 이제는 영아를 살해하기 위하여 광분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반민법 공포 다음날인 9월 23일 한국반공단(단장 이종형)이 주최하고 대한일보사·민중신문사가 후원하는 '반공구국총궐기 및 정권이양 축하 국민대회'가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다. 참고로, 한국반공단 단장 이종형은 대동신문을 경영하는 친일파로서, 반민법 제정과정에서 소급입법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내용의 신문 기사를 연일 내보내던 자였다.

이 반공대회의 실제 목적은 반민법 반대였다. 대통령 이승만이 축하 메시지를 보내고 국무총리 이범석이 직접 참석하여 격려사까지 행한 이 날의 대회장에는 다음과 같은 불온 삐라가 살포되었다.

"반민법은 일제시대 동장이나 반장까지 잡아넣을 수 있어, 온 국민을 옭아매는 망민법(網民法)이다."
"이런 민족분열의 법을 만든 것은 국회 내 공산당 프락치들이다."
"국회 안의 김일성 앞잡이들을 숙청해야 한다."

이승만과 친일파들이 이처럼 노골적으로 반대 활동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국회 측의 친일청산작업은 줄기차게 진행되었다. 9월 29일 국회는 친일행위의 예비적 조사기관으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구성하였다. 문제의 반민특위가 드디어 출범한 것이다.

반민특위의 시스템은 이러했다. 반민특위에서 예비조사를 진행한 다음에 특별검찰부에서 본조사를 담당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특위위원은 현행범이 아닌 한 위원장의 승인 없이 체포되지 않을 불체포특권을 부여받았으며(반민법 제11조), 정부 기타 기관에 대해 문서 제출이나 협력을 요구할 수 있었으며(동법 제15조), 직무를 수행할 때에 행동 자유의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제16조).

또 특경대라는 특수경찰이 반민특위 안에 설치되었다. 10월 23일 열린 반민특위 제1차 위원회회의에서는 김상덕과 김상돈이 각각 위원장 및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제4단계에서 친일파들이 주로 구사한 방법은 친일청산세력을 공산당으로 매도하는 것이었다. 이는 공산당에 대한 대중의 공포심을 자극하는 방법이었다.

이 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훈점이 될 것이다. 남북교류가 진행되는 상황 속에서도 수구세력이 걸핏하면 반공 메카시즘을 그들의 무기로 활용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친일청산 주도세력도 상대방이 가할지 모르는 반공 논리에 대한 대응 논리를 철저히 준비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반민법이 공포되고 반민특위가 구성되었다는 것은, 친일청산을 위한 시대적 의제가 합의되고 그 시대적 의제를 집행할 손과 발이 구성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반민특위가 구성되었다는 것은 친일청산 주도세력이 일종의 '미니 공권력'을 장악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친일파들의 반격도 한층 더 강화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3단계 국회 압박, 4단계 장외투쟁 같은 '비교적 신사적인 방법'을 버리고, '암살 음모'라는 '점잖지 못한 방법'을 선택한다. 5단계 '암살 음모'에 관하여는 이어지는 글에서 계속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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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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