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양요 때에 조선에 침략한 미국 함선. 이미 다 살해된 제너럴셔먼호 선원들을 돌려보내라며 조선을 침략한 것이다.자료사진
사건은 고종 3년(1866)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년 7월 6일 24명의 선원들을 태운 제너럴셔먼호가 평안도 용강현 연안에 출현하였다. 역사적인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평양 과학백과사전출판사가 1980년에 발행한 <조선전사> 13권에 의하면, 이 선박은 중국·베트남·태국 등지에서 해적활동을 벌이던 배였다. 참고로, 탑승 선원의 숫자에 관하여는 학설 대립이 있음을 밝혀 둔다. 24명이 탔다는 것은 통설에 의거한 것이다.
사건 발생 18일 만인 동년 7월 24일 평양 관민(官民)의 일치단결에 의해 제너럴셔먼호는 대동강의 ‘물귀신’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향후 이 사건은 또 다른 문제의 발단이 된다.
조선측은 24명 전원을 사살했지만, 미국측에서는 생존 선원을 돌려보내라는 엉뚱한 요구를 한 것이다. 조선측에서는 외교경로를 통해 “24명 전원이 모두 사살되었다”고 확인해 주었지만, 미국측은 “생존 선원을 왜 돌려보내지 않느냐?”며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다분히 오늘날의 요코다 메구미 사건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미국측이 ‘생존 선원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근거는 어느 중국인의 진술이다. 생존 선원에 대한 진술은 위웬타이(于文泰)라는 중국인의 입에서 나왔다. 그는 미국 군함에 고용되어 조선 해안을 안내하는 일을 했던 사람이다. 그의 진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제너럴셔먼호 (사건) 직후에 조선에 갔을 때, 조선 상인 김자평(金子平)으로부터 분명히 들었다. 김자평은 제너럴셔먼호 생존 선원인 서양인 2명과 중국인 2명을 평양 관아에서 목격했다고 나에게 말했다.”
이러한 위웬타이의 진술을 기초로, 베이징주재 미국공사대리 윌리엄즈(S. W. Williams)와 영국공사 올코크(Alcock)는 청나라 정부에게 “생존 선원의 송환을 위해 중재해 달라”고 요청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청나라의 총리각국사무아문(외교부)은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청나라가 간여할 수는 없다”며 미·영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미국측은 이를 빌미로 조선을 직접 압박하기 위하여 2차례에 걸쳐 각각 미 군함 와츄세트호와 셰난도어호를 조선에 파견하여 생존자 송환을 요구했다. 조선 정부로서는 황당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측은 외교경로를 통해 대체로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생존자가 남아 있다면, 우리가 굳이 숨겨둘 이유가 없다. 우리는 제너럴셔먼호 사건 때에 선원들을 모두 죽였다.”
“우리는 이전에 조난당한 미국 상선 서프라이즈호의 선원들을 구출해 준 적이 있는 나라다. 서양인들을 공연히 잡아둘 이유가 없다.”
이 문제로 인해 조선-청나라-미국 간에 여러 차례에 걸쳐 외교문서가 교환되었고, 그때마다 조선측이 사안을 해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끝까지 “생존 선원을 돌려보내라”는 요구로 시종일관했다.
생존 선원을 억류하고 있는 것과 선원 전부를 이미 죽였다는 것 중에서 후자가 더 가혹하다는 점은 굳이 부언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사람을 죽였다는 것보다는 잡아두고 있다는 것이 덜 가혹한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측은 스스로 자신들이 가혹하게 행동했음을 인정한 셈이다.
조선 정부는 스스로 “우리는 선원 전부를 다 죽였다”고 인정했지만, 미국은 끝까지 “조선이 다 죽이지 않았을 것이니, 나머지 선원들을 돌려보내라”며 조선을 압박한 것이다. 그 누가 보더라도 황당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북한은 요코다 메구미가 북한에서 죽었다고 하고, 일본이 요코다 메구미가 아직 살아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흡사하다.
<평안감영계록> 등 조선측 공식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제너럴셔먼호 선원 전원이 죽은 것은 확실한 사실로 보인다. 대동강변에서 성난 평양 군중들이 선원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했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 서양인들이 살아남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 이전에 제너럴셔먼호 선원들에 의해 가족의 생명을 잃은 사람들이 군중 속에 대거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 24명의 선원들이 살아남기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조선 정부는 미국에게 “돌려보낼 선원이 없다”고 대답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측은 자신들이 직접 확인해 보겠다며 2차례에 걸쳐 미 군함을 조선에 보내 위협을 가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867년에는 와츄세트호를 파견했고, 1868년에는 셰난도어호를 파견했다.
셰난도어호가 2번째로 방문했을 때에는 조선측도 성의를 보이기 위하여 김자평과 미국측의 대질신문까지 주선한 바 있다. 하지만 미국은 “믿을 수 없다”며 거부의사를 나타냈다. 미국이 생존 선원 확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음을 증명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미국측이 생존선원 송환보다는 다른 데에 목적이 있었다는 점은, 그들이 이 문제를 빌미로 1871년에 신미양요를 일으킨 점을 보아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일본처럼 겉으로는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내걸고 있지만, 속으로는 조선을 침략할 목적으로 트집거리를 찾아낸 것에 불과하다.
‘이미 다 해결된 문제’인 납치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일본. ‘이미 다 죽은 사람들’인 제너럴셔먼호 선원들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한 미국. 그들의 목적은 한 가지 점에서 공통된다. 자국민 보호보다는 약소국을 압박하여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겠다는 것이다.
6자회담이 재개되려는 이 시점에, 일본측이 또다시 납치문제를 제기하려 하고 있다. 납치문제를 제기하는 일본측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일본의 상전인 미국이 19세기에 조선을 상대로 무슨 일을 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세월이 지나도 결코 변치 않는 제국주의자들의 속성에 현혹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공유하기
요코다 메구미 사건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21세판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