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92회

등록 2006.12.13 08:31수정 2006.12.14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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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승부였다. 반드시 칼을 맞대야 승부가 아니다. 지금은 분명 위험한 순간이었다. 서로의 선택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누군가 피를 흘릴 터였다. 함곡은 잠시 시간을 벌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목을 죄는 치명적인 올가미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는 함곡선생과 풍대협이 알고 싶어 하는 아주 중요한 몇 가지 정보를 가지고 있소."

거래다. 이제야 상만천은 본래의 자신을 드러냈다. 상인은 언제나 거래를 한다. 유능한 상인일수록 유리한 거래를 한다. 평생을 거래로 살아 온 상만천이 이번이라고 예외일수는 없다.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이오. 사람의 목숨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소."

유능한 상인은 폭리를 취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일방적으로 손해 보는 거래는 일방이 부득이한 상황에 처하거나 급박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거래란 서로 유리하다고 생각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서로 이득이 있다고 생각할 때 거래를 하는 것이다.


잠시 말이 끊겼다. 거래를 앞두고 충분히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 함곡은 고개를 돌려 풍철한을 쳐다보았다. 풍철한의 의중을 묻는 행동이다. 허나 풍철한은 그저 어깨만 으쓱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끼어들기도 머쓱한 상황이다. 어차피 거래를 튼 것은 함곡이었으니 함곡이 마무리하는 것이 나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흥... 정말 돼지새끼처럼 꾸역꾸역 많이도 처먹는군."


@BRI@그 때였다. 잠시 말이 끊긴 틈을 타 지금까지 참고 있던 상교교가 코웃음을 쳤다. 지금까지 참았던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이런 심각한 대화가 오고가고 있음에도 전혀 상관없이 여전히 음식을 먹고 있는 능효봉에 대한 조롱과 욕설이었다.

능효봉은 입속에서 천천히 씹고 있던 음식을 몇 번 더 씹은 후에 목으로 넘겼다. 능효봉의 먹는 모습은 정말 특이할 정도였다. 그는 조금의 음식을 입에 넣고 아주 오래 씹었다. 차려진 음식은 입에 살살 녹을 정도로 훌륭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음식이 침과 섞여 액체가 될 때까지 씹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상교교를 바라보았다. 특별히 노려보는 눈길이 아니었음에도 상교교는 그의 눈빛을 받자마자 움찔하더니 능효봉의 시선을 피했다.

"너는 확실히 온 몸에 피멍이 들 정도로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그리 주의를 주었는데도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니 말이다."

이런 자리에서 화를 참지 못하고 어찌하든 기회를 잡아 망신을 주려는 상교교나 그것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부친이 있는 앞에서 맞아야 정신을 차릴 계집이라고 말하는 그 역시 똑같은 부류일지 몰랐다.

"네 까짓 게 감히...?"

"잘 들어라."

능효봉은 상만천을 의식하지 않았다. 아니 전혀 의식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의 입에서 상교교에 대한 '...년' 따위의 상소리는 나오지 않았으니까.

"언제나 음식이 남아돌아 썩어 버릴 정도로 호의호식(好衣好食)한 너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나는 언제나 굶주렸다. 어렸을 적 한 번도 배가 부르게 먹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누구에게 구걸하거나 남의 것을 훔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더 더욱 남의 것을 빼앗아 본 적도 없지. 하여튼 어느 날인가 내 앞에 이렇듯 화려하고 푸짐한 음식들이 놓여졌었다."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능효봉은 아주 담담하게, 한편으로는 남의 이야기하듯 말을 하고 있었다.

"허겁지겁 마구 먹었다. 난생 처음 보는 음식이었을 뿐 아니라 너무나 귀하고 맛있는 음식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무척이나 고생을 했지. 먹은 것보다 더 많이 토하고, 설사를 해야 했다. 사흘 내내... 내 배는 이런 기름진 음식을 받아들이는데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지. 그러면서도 나는 또 다시 차려진 음식의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었지. 열흘 동안 나는 음식다운 음식을 입으로 삼킬 수 없었다."

분명 아픈 과거였다. 아무리 성공을 했더라도 이리 담담하게 말할 내용은 아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말을 중단시키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어떤 부류의 인간일까 궁금해 하던 터였다.

"그 뒤로 나는 어릴 적 풀뿌리나 나무껍질을 씹던 버릇대로 조금씩... 그리고 되도록 천천히 씹는 버릇이 생겼다. 아무리 부드러운 음식도 천천히 오래 씹어야 속이 편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한 거친 음식보다 부드러운 음식일수록 소화하기 어렵다는 사실도 깨달았지."

".............!"

그는 찻물을 입에 넣어 우물거리며 입을 가신 뒤 시선을 상교교에게 고정시켰다.

"네가 한 단 한마디의 말에는 세 가지 잘못이 있다. 그것이 네가 무례한 계집이고, 온 몸에 피멍이 들도록 맞아야 하는 이유다."

"흥...!"

"첫째 나는 돼지새끼가 아니다. 나는 내가 먹은 것을 토해낸 그 사건 이후부터 절대 많이 먹지 않는다. 지금껏 배가 부르도록 먹어본 적이 없고, 오늘 이 자리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까지 먹은 양은 네가 먹은 양보다 비슷하거나 조금 많을 뿐이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아직까지 음식을 먹고 있지만 그가 먹은 양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 많지 않았다. 아마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다른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이 먹을 것이다.

"두 번째 나는 꾸역꾸역 처먹지 않았다. 급히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 것을 꾸역꾸역이라고 표현하는 것이지 조금씩 오래 천천히 먹은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상교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망신을 주기 위해 던진 말이었는데 능효봉의 반박은 의외로 논리정연하고 조리가 있었다. 뭔가 반박하려 했지만 식탁에 앉아 있는 사람들 모두가 아주 흥미로운 듯 능효봉의 말을 듣자 그녀 역시 입을 열지 못했다.

더구나 상만천의 오른쪽 눈썹이 치켜 올라가는 것을 본 그녀는 더 더욱 말을 할 수 없었다. 상만천의 저런 버릇은 그가 매우 흥미가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었고, 그런 흥미를 자신이 깨버린다면 상만천은 용서하지 않고 치도곤을 칠 것이었다.

"세 번째 네가 한 결정적인 잘못은 네가 주인으로서의 태도를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네 부친이 점심을 대접한다고 해서이다. 분위기가 무겁고 식욕이 나지 않는다고 해서 정성스럽게 차린 음식을 앞에 두고 깨작거리는 모습은 주인에 대한 손님의 예가 아니다. 맛있게 먹는 것은 손님이 해야 할 도리다. 그 반면에 주인은 대접을 하기 위해 불렀다면 손님들이 즐겁고 맛있게 먹도록 권하기도 하고 분위기도 그렇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능효봉의 말에 좌중의 안색은 자신들도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굳어졌다. 능효봉은 한 마디의 말로 이곳에 있는 주인과 손님을 모두 싸잡아 나무란 것이다. 그 지적은 매우 정확하고 예리해서 자신들의 실태를 깨닫기 충분했고,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손님들은 손님들대로 하마터면 놓았던 수저를 다시 들 뻔 했고, 주인은 주인대로 음식을 다시 가져오라고 시킬 뻔 했다.

"갑자기 허기가 지는군."

풍철한이 계면쩍은 웃음을 지으며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좌등도 마찬가지였다. 그와 동시에 상만천은 갑자기 박수를 쳤다.

짝--짝--짝--짝--!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아주 밝은 웃음이 떠올랐다. 그것은 아주 순순하고 해맑은 어린애 같은 웃음이어서 오십이 넘은 인물이 저런 웃음을 지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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