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대의 라이벌 서로를 탐색하다

[태종 이방원 32] 강자의 여유 앞에 고개 숙인 약자

등록 2007.01.24 19:04수정 2007.01.25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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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회군세력은 개혁카드를 버리고 강력한 혁명드라이브를 걸었다. 먼저 폐가입진(廢假入眞)에 따라 여주에서 강릉으로 이배된 우왕과 강화에 유배된 창왕을 전격 처형했다. 고려 왕실의 적통자 왕씨가 아닌 요승 신돈의 핏줄로 왕 노릇하며 백성을 혼란에 빠뜨렸으니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개경 정가는 공포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본색을 감추고 은거하던 자들은 색깔을 드러냈다. 엉거주춤하던 중도세력은 살아남기 위하여 회군세력에 붙었다. 전향자도 있었고 백기 투항자도 있었다. 밀직제학 이성중은 대대로 내려오던 가보를 이성계에게 바치며 알아서 기었다. 살벌한 정세 속에서 세력이 확연하게 재편되었다.


회군세력이 옹립한 공양왕은 역설적이게도 수구세력에 기울었다. 무도하게 휘둘러대는 회군세력의 칼날 앞에 생명의 위험을 느꼈기 때문이다. 우왕과 창왕의 잔존세력이 왕실을 장악하여 공양왕을 감싸고돌았다. 공양왕을 괴뢰로 만들어놓고 그를 발판삼아 혁명의 수순을 밟으려던 회군세력의 계획은 차질을 빚었다.

혁명세력은 고삐를 바짝 죄었다. 5군을 3군으로 축소 개편한 이성계는 도총제사에 올랐다.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다. 원수(元帥)들의 인장도 회수했다. 있을 수도 있는 장수들의 책동을 사전에 봉쇄하기 위한 조치였다. 전군의 군권을 거머쥔 이성계는 예정된 수순대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밀어 붙이는 자와 밀리는 자

@BRI@고려왕실을 지키려는 보호세력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이색을 정점으로 정몽주, 이숭인, 우현보 등이 전열을 정비했다. 왕도 개경은 일견 평화스러워 보였으나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았다. 개인의 생명과 고려라는 국채를 담보로 한 전면전이 임박한 것이다.

첨예한 대치전선에 폭풍이 몰아쳤다. 윤이(尹彝)와 이초(李初)가 명나라를 방문하여 패착을 둔 것이다. 수구세력이 선제공격을 감행했지만 오히려 타격을 입은 사건이다. 윤이와 이초가 명나라 황제를 찾아가 "이성계가 고려 조정의 중신들을 유배 보내고 장차 명나라를 칠 계획을 하고 있다"고 무고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우현보, 권중화, 경보, 장하, 홍인계, 윤유린, 최공철 등은 순군옥(巡軍獄)에 투옥되고, 이색, 이임, 우인열, 이인민, 정지, 이숭인, 권근, 이종학, 이귀생 등은 청주의 감옥에 갇히는 옥사가 벌어졌다.

사건의 맥락은 이색의 '친조외교'와 맞닿아 있다. 명나라의 힘을 빌려서 정적을 제거하려는 계책이다. 혁명세력은 원나라와 명나라가 대륙의 패권을 놓고 쟁패를 벌이는 대륙의 판세를 읽고 있었는데 수구세력은 구태의연한 방법을 택했다. 또한 수구세력은 이방원이 운용하는 추동 '정보참모본부'의 능력을 과소평가한 우를 범했다.


고려의 모든 정보는 추동 이방원의 사랑채에 수집되었다. 잡스러운 소문에서부터 순도 높은 고급정보까지 이방원의 안테나에 걸렸다. 궁궐은 물론 전국의 나루터와 포구 그리고 국경지방에 아버지의 군사를 풀어놓은 이방원의 첩보망에 파평군 윤이와 중랑장 이초의 행적이 포착되지 않을 리 없었다.

이방원이 하정사 이색을 수행하여 금릉에서 명 태조를 알현했을 때 주원장의 심중을 읽었다. 목숨 걸고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는 명나라의 적이 아니라 우군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인질삼아 데리고 간 이방원에게 오히려 큰 선물을 안겨준 꼴이 되었다. 주원장을 믿고 쳐둔 그물에 수구세력의 거물들이 걸려든 것이다.

이방원은 전리정랑직에 있으면서 정보의 효용성을 통감했다. 전리정랑은 조선시대 이조정랑에 해당한다. 관리들의 인사문제를 다루는 부서다. 관리를 천거하고 승진시키는 과정에서 대상의 인적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낭패를 당하고 유배를 떠나는 선배들을 많이 목격했다. 인사는 만사다. 부실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 인사는 망사가 된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방원은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후 아버지의 정보참모를 자임하고 나섰다. 그것은 자신과 가계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공격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권력은 정보를 먹고 자란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쟁취한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누가 더 많이 가지고 있느냐 에서 판가름 난다는 것을 터득해 가고 있는 것이다.

조선 최대의 라이벌 서로를 탐색하다

수집한 정보를 참모들과 분석하고 정리했다. 대응의 완급조절도 방원의 몫이었다. 분석된 자료를 바탕으로 대안은 정도전과 머리를 맞대고 심도 있게 논의했다. 이 과정에서 이방원은 정도전의 깊은 통찰력에 감탄했고 정도전은 방원의 예리한 관찰력에 탄복했다. 우연찮은 기회에 서로를 탐색한 것이다.

방원과 정도전은 30세라는 나이 차가 난다. 거의 아버지 동년배다. 방원은 정도전을 삼촌처럼, 아저씨처럼 따랐고 정도전도 방원을 조카처럼 대했다. 조선 최대의 라이벌 정도전과 이방원도 이렇게 머리를 맞대고 한솥밥을 먹었던 때가 있었다.

일거에 수구세력을 일망타진한 혁명세력은 정도전을 명나라에 보내 해명하는 것으로 사건을 일단락 지었다. 군부세력은 공양왕과 명나라의 청을 받아들여 유화책을 펼쳤다. 이색과 우현보를 석방한 것이다.

감옥(貶所)에서 풀려난 이색이 숭교리 이성계의 사저를 찾았다. 이성계의 초청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어색했다. 하지만 이성계는 국가의 원로로서 예를 다하여 그를 맞았다. 윗자리로 안내하여 꿇어앉아 술을 올렸다. 이색이 민망하여 앉아 마시려 하자 서서 마시기를 강권했다. 강자의 여유다.

사양하던 이색이 서서 술을 마셨다. 강자가 꿇어 앉아있고 약자가 서있는 묘한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술잔을 들고 엎드려 있는 이성계를 바라보는 순간 훌쩍 커버린 이성계가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보였다.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정도전과 이방원은 만감이 교차했다.

극한으로 치닫던 혁명세력과 수호세력이 이색의 이성계 사저 방문으로 화해한 듯 보였으나 미봉책이었을 뿐 긴장관계는 지속되었다. 이색은 정도전의 스승이었고 우현보는 이방원의 스승이었다.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제지간에 결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스승도 걸림돌이면 걷어내라

정도전이 스승 이색을 걷어내야 할 걸림돌로 판단한 것은 토지개혁 시행과정이었다. 당대의 경제전문가 조준과 경세가 정도전이 야심적으로 내놓은 토지개혁은 수구세력의 저항에 부딪혀 좌초했다. 그 중심에 이색이 있었다. 이색은 문하시중으로서 수구세력의 바람막이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전국의 토지를 과점한 권문세족은 수확물의 50%를 착취하며 백성들을 수탈했다. 이러한 토지를 국가에서 몰수하여 농민들로 하여금 경작케 하여 수확의 10%를 세금으로 거두어들이겠다는 과전법은 가히 혁명적인 조치였다. 땅 한 평 없는 백성들에겐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지만 수구세력은 극력 반발했다. 그 정점에 이색이 있었다.

정도전이 칼을 뽑았다. 이색을 탄핵하고 나선 것이다. 폐가입진(廢假入眞)의 방조자란 것이다. 우왕과 창왕이 고려왕실의 적통자가 아닌데도 옹립하는데 앞장섰다는 것이다. 이색은 정도전의 스승이다. 사제지간에 죽고 죽이는 한판 승부가 붙은 것이다. 정도전은 스승을 혁명으로 가는 길목의 걸림돌로 생각했다. 권력은 냉혹한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문화면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문화면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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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 <병자호란>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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