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그쳤지만 모가두는 후줄근하게 젖어있는 모습이었다. 나무 위에 착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몰골은 말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술 냄새를 풍기지는 않았다. 반일봉의 눈가에 잠시 살기가 스쳤다.
"낮에는 술독에 빠져 있거나 아무 곳에 처박혀 자는 듯한 것이 다 계산된 행동이었겠지? 매일 밤에는 쥐새끼처럼 이리저리 쏘다니며 기웃거리는 것을 보니 말이야…."
@BRI@반일봉이 나직이 냉소를 쳤다. 이미 야접과 만나는 것을 본 이상 모가두를 그냥 보낼 생각은 없었다. 아니 그냥 보내면 절대 안 되는 일이었다. 운중보의 교두로서 외인과 내통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떠한 변명으로도 무마될 수 없는 것이었다. 문제는 주위의 시선을 끌지 않고 빨리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점.
"어…? 반교두는 그럼 낮이나 밤이나 내 뒤만 졸졸 따라다녔소? 참 할 일도 없지…. 나같이 별 볼일 없는 놈의 뒤나 따라다니면 언제 아이들을 가르치겠소…? 쯧쯧…."
모가두는 점차 진기를 끌어올리고 있는 반일봉의 살기를 느끼지 못했는지 반일봉 앞으로 다가오며 여전히 유들거렸다. 머리통이 유난히 큰 모가두가 불안정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모습은 정말 우스꽝스러웠다.
"역시 보주가 유일하게 믿는 제자가 네놈이라는 사실이 맞는 것 같군. 또한 제자 중 유일하게 사부를 극진히 모시는 놈이 너라는 사실까지도 말이야…."
아직 오장 정도의 거리였다. 모가두가 자신의 앞 일장 이내로 들어온다면 기습적으로 자신의 독문비기인 주련이십칠식(珠聯二十七式)을 펼칠 생각이었다. 모가두가 아무리 보주의 제자라 하지만 무공이 가장 뒤떨어진다는 사실은 이미 훤히 드러난 것이어서 능히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허… 나이도 몇 살 차이 나지도 않는데 이놈 저놈 하지 마시오. 듣는 사람 별로 기분 좋지 않소."
반일봉은 속으로 '아차' 했다. 미리 살의를 내비쳐 상대에게 경각심을 줄 필요가 없다. 먹이가 덫의 범위 안으로 들어오도록 기다려야 한다.
"내가 이곳에 처음 들어왔을 때 전대 수석교두이셨던 궁(穹)노선배께서 그러시더군. 운중보에는 몇 가지 이해하지 못할 일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너를 보주가 제자로 발탁한 일이라고…."
아직 삼장 정도다. 조금만 더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반일봉은 표정의 변화 없이 상대가 눈치 채지 못하게 최대한 조심을 하며 진기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나도 이상할 정도요. 사부님을 극진히 모시는 일은 아주 당연한 일이지만 그런 의미에서 더욱 사부님을 잘 모셔야겠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말이오. 나는 항상 자책하고 있소. 내 능력이 불비하여 언제나 사부님께 불충을 저지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죄송스런 마음 때문에 말이오. 그리고… 또 한 가지 불충스런 일이 있소."
모가두의 음성이 속삭이듯 아주 나직하게 변했다. 이미 모가두는 공격권 범위로 들어서고 있었다. 만반의 준비는 갖추었지만 나직한 모가두의 말에 무심코 물었다.
"무엇 말인가?"
그 순간이었다. 모가두의 털럭거리며 내려져 있던 양팔이 급작스럽게 앞으로 쭉 뻗었다. 희끗한 섬광이 어느새 잔뜩 긴장하고 있던 반일봉의 목과 옆구리로 쏘아갔다.
"으헙…!"
인간의 몸이란 고식적이어서 자신이 공격하고자 잔뜩 긴장을 하는 순간에 급작스런 변화가 생기면 오히려 더 대응하기 어렵다. 뱀 같은 허리를 가졌다는 반일봉의 몸이 그런 셈이었다. 그는 최대한 유연한 자신의 몸을 이용해 급히 몸을 틀면서 뒤로 주륵 물러났지만 모가두의 기습은 정말 예상치 못한 빠름이었다.
'당했다…!'
옆구리에서 불에 덴 듯한 화끈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목 줄기에서도 뜨뜻한 액체가 흘러내리는 느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처를 입었음이 분명했다. 허나 목 줄기의 상처는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문제는 옆구리였다. 그리고 상대에 대한 두려움이 왈칵 밀려들었다.
"네… 네놈은… 벌써 보주의 심인검(心印劍)을 완전히 익혔구…나!"
모가두가 운중보주의 심인검을 익혔으리라는 사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한 대제자 장문위를 제외하고는 심인검을 운용할 수 있는 제자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자질의 뛰어남은 옥기룡이 최고였으나 옥기룡은 보주의 무공보다 혈간의 무공에 더 심취했고, 그 수위도 오히려 혈간의 것이 더 높아 숙부의 비기를 더욱 완벽하게 펼치는 편이었다.
또한 모가두는 신체적인 특성을 살려 검을 포기하고 대신 장(掌)을 익힌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보주의 심인검을 이토록 높은 경지까지 익혔다고는 정녕 생각할 수 없었던 터였다.
"대단하군…. 역시 환영교수(幻影巧手)란 별호가 부끄럽지 않은 몸놀림이야…."
비웃음인지 아니면 경탄인지 모를 나직한 탄성과 함께 불안정하게 걸었던 모가두의 신형이 빠르게 반일봉의 신형을 따라잡았다. 반일봉이 방어 자세를 취하며 쌍수를 교차시켰다. 문득 밀려든 두려움과 함께 모가두의 얼굴이 살귀(殺鬼)처럼 보였다. 항상 교두들에게 비웃음의 대상이던 모가두가 저렇게 보인다는 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내 재질이 부족해 완전히 익히지는 못했지. 그래서 못난 이 놈은 언제나 사부님께 불충하고 있음을 한탄하지. 운중보에 있으면서도 사부님을 배신하고 심지어 업신여기는 당신 같은 족속들을 내 손으로 죽이지 못해 말이야. 하지만 안심해도 좋아. 당신의 목을 딸 정도는 될 거야."
정면으로 달려드는 모가두를 향해 반일봉은 주련이십칠식 중 가장 치명적인 초식이라 알려진 이십사식 생사금환(生死禽幻)의 초식을 필사적으로 펼쳤다. 한순간 빽빽한 손 그림자가 허공을 덮으며 다가드는 모가두의 상체 대혈들을 노리며 파고들었다.
"비겁하게 기습해 득을 봤다고 기고만장이로구나…!"
모가두의 신형이 반일봉의 맹렬한 공격에 잠시 주춤하는 듯했다. 허나 그것도 잠시 모가두는 무모할 정도로 난무하는 손 그림자 사이를 헤집고 들어갔다. 동시에 모가두 손바닥이 쫙 펴지고 팔이 수평으로 돌아가는 순간 막강한 장력이 폭풍이 몰아치듯 주위를 휩쓸었고, 반일봉의 손 환영들은 방향을 잠시 잃고 흔들리는 듯했다.
"사람들은 몰라… 심인검의 요체는 검이 아니라 기(氣)라는 것을…. 그리고 검으로 익히는 것보다 장(掌)으로 익히는 것이 훨씬 쉽다는 것을…."
"………!"
그 순간 반일봉은 폭풍 속에서 내리꽂히는 섬광을 보았다. 아니 자신의 목 줄기를 노리며 쏘아오는 섬광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 그리고 일순간에 정신이 아득해지며 감각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네… 네놈을… 모르고 있었…구나… 끄르륵…."
자신의 몸이 옆으로 넘어가 얼굴이 땅바닥에 처박혀도 아픈 느낌이 없었다. 이미 막힌 숨 줄기가 말을 하기 어렵게 했다. 자신은 느끼지 못했지만 옆구리는 이미 살이 갈라져 내장이 삐쭉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첫 번째 모가두의 공격에서 이미 반일봉은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상태였던 것이다.
"누구나 다 그렇지. 인간이 다른 인간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이지 알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도 또 다른 면을 보고 놀라는 것이 인간이야."
"네… 네…놈에게… 이리도… 허망하…게…."
아마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리고 아주 우둔하게 생각했던 모가두에게 당한 것이 죽는 순간까지 억울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실수가 무엇인지 모르고 죽었다.
자신이 기습하고자 노리고 있다면 상대 역시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선수를 치거나 충분한 방비를 했어야 마땅했다. 아주 간단한 것이었지만 아마 교두 생활 십이 년이란 세월이 실전적인 감각을 잃어버리게 했는지 모른다.
모가두는 눈을 부릅뜨고 죽은 반일봉을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무림에서 살아남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 무공실력이지만, 살고 죽는 것은 반드시 무공의 고하로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없으면 도망쳐야 한다. 자신이 있더라도 상대를 충분히 읽어야 한다. 반일봉은 그것을 실수했고, 그 결과는 죽음이었다.
"어차피…."
모가두는 반일봉의 시체를 치울 것인지에 대해 망설였다. 반일봉의 시신에는 분명한 사인(死因)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아마 저들은 이 시신을 보고 나면 경각심을 배가시킬 터였다. 하지만 그는 그냥 몸을 돌리고는 터덜터덜 걸었다.
상대에게 경고를 발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제는 숨기는 것이 아니라 더욱 상대를 자극해 움직이도록 만들어야 한다. 상대가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미친 듯 뛰어다니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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