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신록 발표와 세자책봉을 서둘러 마친 이성계는 강비를 대동하고 평주 온천으로 휴양을 떠났다. 고심에 찬 결단을 치유하며 지친 심신에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다. 또한, 있을 수 있는 불평불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싶어서였다. 나머지 뒷수습은 정도전 몫이었다. 정도전은 현실을 기정사실화 하고 굳히기에 들어갔다.
우선 신하들을 아우르는 충성맹세가 필요했다. 군(君)으로 책봉된 왕자들과 공신록에 등록된 신하들을 왕륜동으로 불러냈다. 왕세자로 책봉된 방석도 당연히 포함됐다. 일명 왕륜동 회동이다.
"문하좌시중 배극렴 등은 감히 황천후토(皇天后土)와 송악, 성황 등 모든 신령에게 고합니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하늘의 뜻에 응하고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대명을 받자와 큰 왕업을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일을 같이 했으므로 함께 한 몸이 되었으니 다행함이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자손에게 이르기까지 대대로 이 맹약을 지킬 것이니 혹시 변함이 있으면 신(神)이 반드시 죄를 줄 것입니다."-<태조실록>
개국 공신들은 물론 그 자손과 동생 그리고 사위들까지 참석하게 하여 충효계(忠孝契)를 맺게 했다. 충이라는 이름아래 한 몸으로 묶어가는 작업이다. 인위적인 이러한 '묶음'이 과연 통할까? 역사는 아니라고 답한다.
태평성대를 이루겠다는 혁명공약 발표
@BRI@역성혁명을 아니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민심을 바로잡기 위하여 편민사목(便民事目)을 발표 했다. 오늘날의 혁명공약에 해당하는 편민사목은 올바른 정치를 펼쳐 백성들을 배부르고 등 따시게 하여 태평성대를 이루겠다는 약속을 담고 있었다. 백성들을 다독이고 신하들을 불러내어 충성맹세를 받아냈으니 이제는 눈을 밖으로 돌려 명나라를 살펴야 한다.
즉위식 이튿날 밀직직지사 조반을 명나라에 보내어 이성계의 등극을 고했으나 아직 국호도 없었으며 명나라로부터 이성계의 등극을 인정받은 바도 없었다. 우선 국호(國號)가 문제였다. 정도전은 명나라를 상대로 절묘한 승부수를 띄웠다. 예문관학사(藝文館學士) 한상질을 보내어 중국 남경에 가서 조선(朝鮮)과 화령(和寧)으로써 국호를 고치기를 청하게 하였다.
“온 나라의 신민들이 신(臣)을 추대하여 임시로 국사를 보게 하였으므로 놀라고 두려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이 생각하옵건대 나라를 차지하고 국호(國號)를 세우는 것은 진실로 소신(小臣)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황제께서 신에게 권지국사(權知國事)를 허가하시고 조선(朝鮮)과 화령(和寧) 등의 칭호로써 천총(天聰)에 주달(奏達)하오니 삼가 황제께서 재가(裁可)해 주심을 바라옵니다.”- <태조실록>
신(臣)은 이성계이고 황제는 주원장이다. 이성계가 주원장의 신하 입장에서 권지국사를 허가해 달라고 청하고 있다. '조선'과 '화령' 둘 중에서 하나를 국호로 지정해 달라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현실이다. 권지국사는 왕호(王號)를 인정받지 못하는 동안에 사용한 왕의 칭호로 권서국사(權署國事)라고도 한다.
국호에 있어서 정도전의 희망과 복안은 오로지 ‘조선’ 하나였다. 하지만 우리가 조선 하나만 들이밀었을 때 주원장이 거절하면 난감했다. 외교문제로 비화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피하고 주원장으로 하여금 골라잡을 수 있는 기쁨을 주기 위하여 ‘조선’과 ‘화령’을 금릉에 보냈다. 골라잡으라는 것이다.
정도전의 전략은 적중했다. “정성이 가상하다”며 주원장이 흡족한 마음으로 조선을 지정했다. 대륙의 변방에 앉아있는 정도전이 8천리 떨어진 금릉에 앉아있는 주원장의 마음을 읽고 있는 결과였다.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왕사로 삼는 한편 천도를 명했다. 백성들이 질시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개경을 빨리 떠나고 싶었다.
개경을 떠나고 싶다
권중화와 남은을 대동하고 계룡산을 답사한 이성계는 계룡산을 새로운 도읍지로 지목하고 공사를 서두르도록 명했다. 개경에서부터 동행한 김주를 아예 계룡산에 눌러있게 하며 공사를 지휘 감독하도록 했다. 새로운 도읍지의 토목공사가 시작되었다.
한편, 함흥에서 돌아온 방원은 낙담 바로 그것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정2품 벼슬이었으나 아무런 관직이 없었다. 허접한 사람들까지 등재된 공신록에도 자신의 이름은 없었다.
“이 나라를 세우는데 공이 있는 자가 누구인가?” 라고 스스로 자신에게 반문했을 때 울화가 치밀었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표출할 수도 없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왕위에 있고 자신은 왕자이기 때문이었다.
방원을 가슴 치게 한 것은 방석의 세자 책봉이었다. 맏형 방우 형님에게 세자가 돌아가리라는 자신의 생각은 기가 막히게 빗나갔다. 그러한 결정을 한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그러한 결심을 하도록 유도한 서모 강비가 한없이 미웠다. 26세의 젊은 청년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방원은 깊은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배후세력이 누구인가? 방석을 세자로 했을 때 반사이익을 노리는 자가 누구인가? 라고 자문했을 때 떠오르는 인물은 정도전이었다. 하지만 심증은 가지만 물증은 없었다. 굳이 물증을 찾으라면 정도전이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정도전 직책은 비록 문하시랑 찬성사로 낮았지만 품계는 1품이었다. 조정 내 최고 의결기구인 도평의사사 고위직 동판사와 관리들의 인사권을 행사하는 상서사 판사직을 틀어쥐고 있었다. 명실상부한 2인자였다.
정도전이 구상한 신권정치에는 왕권약화는 물론 왕실의 권한축소도 포함되어 있었다. 왕자는 상징적인 왕자의 권리만 행사할 뿐 중앙 정치무대에 있어서도 안 되고 정사에 관여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왕자가 중앙정치무대에서 관직을 꿰차고 앉아 있으면 세(勢)가 형성되고 그 세가 신권을 위협하는 화(禍)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재상에게 힘이 모아지고 세(勢)가 형성되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시 정도전의 직책은 문하시랑 찬성사로 낮았지만 힘이 모아졌다. 정보를 총괄하는 기무직에 해당하는 도평의사사 판사, 그리고 관리들의 승진과 도태를 전담하는 상서사 판사직을 겸하고 있었다. 계품사로 금릉에 다녀와서는 판3군판사에 이어 삼도도통사로 병권까지 손에 넣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비록 취중이었지만 자신이 모시는 군주 이성계를 한고조에 빗대어 “한고조(漢高祖)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張子房) 한고조를 쓴 것이다.”(<태조실록>) 라는 오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정도전은 무어라 말할까? 사자(死者)는 말이 없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이성계가 방원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하여 동북면을 맡겨줬으나 반납해 버렸다. 또 다시 전라도 절제사를 맡겨줬으나 성에 차지 않았다. 방원의 생각은 왕자도 능력이 있으면 신하의 입장에서 정사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여기에서부터 조선 최대의 라이벌 정도전과 이방원의 이념이 틈새가 갈라지게 된다.
한반도 운하계획 600년 전에도 있었다
이방원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절로 기록되는 시절이 시작되었다. 두문불출. 집에 틀어박혀 책만 읽었다. 그렇지만 평상심을 잃어버린 그의 눈에 글이 들어올 리 없었다. 조정에 출사한 작은 아버지 이화와 아버지의 친구 이지란 그리고, 장사길이 심정적으로 위로를 보내왔지만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며 추동 집에 칩거하고 있는 방원을 하륜(河崙)이 찾아왔다. 장인 민제의 오랜 친구이며 당대의 석학이다. 방원이 민제의 딸과 결혼식 하던 날 방원의 관상을 보고 “둘째 따님이 왕자를 낳겠소이다”라고 해 민제를 놀라게 한 인물이다. 그 둘째 딸이 세종대왕의 어머니이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에게 정도전, 남은, 심효생 3인방이 있었다면 훗날 등극한 태종 이방원에게도 3인방이 있었으니 하륜, 이숙번, 조영무다. 그 중에 우두머리가 하륜이다. 해박한 학문과 깊은 경제 감각으로 태종조 태평성대를 이끌었던 사람이다.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여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인물이지만 조선이 낳은 출중한 경세가다.
요즈음 시중에 화제가 되고 있는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한반도 종단 대운하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지금부터 600여년 전 운하를 계획하고 현지 실사를 마쳤던 인물이다. 그때와 지금은 기술과 장비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삽과 곡괭이와 우마차 밖에 없던 그 시절에 운하를 구상하고 현장조사를 마쳤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문화면에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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