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섬에 새겨진 전쟁의 생채기

[섬이야기 60] 전남 해남군 어불도 2

등록 2007.03.02 11:50수정 2007.03.02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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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불도 마을 앞 바다 ⓒ 김준


바다의 어둠은 소리와 함께 걷힌다. 갈매기들이 먹이 찾아 울기 시작한다. 물김을 뜯는 채취선은 김발의 물을 털어내며 물김을 걷어낸다. 바다의 어둠은 소리와 함께 걷힌다.

미황사가 자리한 달마산 위로 붉은 기운이 돌기 시작한다. 검은 먹을 묻힌 붓을 그어 놓은 듯 바다와 하늘을 가르던 달마산이 땅 끝에 이르러 점점 멀어진다. 이내 바다와 하늘이 붉은 색을 찾는다.

채취선이 지나간 바다가 거칠게 몸을 일으키더니 이내 잠든다. 바람이 불지 않아 다행이다. 만호바다에 떠 있는 김발 부표들이 전쟁에서 죽은 조선과 일본군의 머리처럼 보인다. 진도와 해남을 연결하는 만호바다. 남쪽으로 거슬러 멀리 고금도 덕진과 해남의 어란진 그리고 진도의 벽파진으로 이어지는 이 바다는 조선의 운명을 결정하는 명량해전의 싸움터였다.

만호바다에서 어란진은 보이지 않는다. 어란진을 가로막은 작은 섬 어불도 때문이다. 이순신은 일찍이 이를 간파하고 이곳에서 조선의 운명을 건 싸움을 준비했던 것이다.

전쟁을 기억하는 섬과 바다

조선시대 일본과 전쟁으로 바다를 내줘야 했던 주민들은 일제강점기엔 태평양 전쟁을 준비하는 일본군에게 동원되어 섬의 능선에 호를 파고 바위굴을 뚫어야 했다. 이러 저래 섬과 바다는 주민들의 몫이 아니었다.

섬 자체가 구압산이라는 해발 30여 미터의 작은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안도로가 만들어진 남쪽 사면의 바다와 접한 곳에 아홉 개의 길고 짧은 동굴이 있다. 지금은 김양식에 이용되는 각종 어구들이 보관되어 있지만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전쟁시설이다. 마을이장 김영수(70)씨의 기억에 의하면, 일본군이 군수품을 숨기기 위해서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 만들었다고 한다.

동굴의 규모는 폭 2-3미터에 폭 3-4미터에 이르며, 길이는 짧은 것이 3미터에서 긴 것은 15미터에 이른다. 김씨는 동굴만이 아니라 능선에 호를 파 전쟁에 대비했다고 알려줬다. 단순히 군수품을 숨기는 차원을 넘어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전쟁을 준비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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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불도에 주둔한 일본군이 전쟁에 대비해 우리나라 사람을 동원해 바닷가에 판 바위굴로 주민들은 양식 어구를 보관창고로 이용하고 있다.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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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불도 구압산 바위에 모두 아홉 개의 크고 작은 바위굴이 있다. ⓒ 김준


어불도와 일본의 악연은 이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500여 년 전 정유재란으로 거슬러 가보자. 조정에서는 원균이 이끌던 조선수군이 1597년 칠천량전투(거제도 칠천도 인근)에서 대패하자, 백의종군을 하고 있던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시킨다.

10여 척의 판옥선을 수습해 첫 전투를 한 곳이 어불도 인근 바다였다. 김 양식이 즐비한 이곳 바다를 주민들은 '만호바다'라고 부른다. 아직 제대로 정비되지 않는 상황에서 어란진의 조선수군은 8월(1597년 음력 8월 27일음) 왜선 8척을 맞았다.

이순신은 적을 만호바다 깊숙이 유인하여 격퇴하였다. 어란진이 수군 만호진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불도가 동서로 길게 뻗어 어란진을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불도의 지세는 어란진으로 들어오는 파도와 바람을 막아 줄 뿐만 아니라 수군본영이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막았다.

이후 이순신은 본진을 벽파진으로 옮겨 한 차례 싸움을 벌이는데, 전략가들은 이 두 전투를 명량해전을 위한 유인전투로 평가한다. 그리고 마침내 해전사에 길이 남을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수군을 거의 전멸시킨 일본군은 남원성과 전주성을 공격하고 서쪽바다를 장악하여 한양으로 진격하려 했지만 계획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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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따뜻해지자 주민들이 마늘밭에 풀을 매고 있다. 어불도는 논은 없으며, 일부 어민들이 구압산 산 기슭을 일궈 마늘농사를 짓고 있다. ⓒ 김준


삼치 덕에 어둠을 밝혔다

어불도가 김을 매며 살기 전에는 삼치잡이를 했다. 삼치잡이라면 고흥 나로도와 완도 청산도를 꼽지만 해남 어불도를 무시했다간 큰 코 다친다. 1970년대 초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약 10여 년간 어불도 40-60여 척 배들이 삼치잡이에 나섰다.

당시에 가구 수가 70-80여 가구였던 점을 생각하면, 작은 섬에 삼치잡이가 얼마나 성했는지 알 수 있다. 삼치잡이 배를 타려고 어불도로 들어온 사람들로 셋방이 없었다. 잡은 삼치는 식구미(비용)을 제하고 선원과 선주는 4:6으로 나누었다. 이를 짓가림이라 한다.

12월부터 3월까지 깊은 겨울만 빼고는 철없이 잡았던 것이 삼치였다. 그 덕에 어란진에는 늘 무역선이 늘 떠 있어 잡는 대로 일본으로 가져갔다. 삼치배는 6-9명 타는 7-8톤 규모의 배로 위로는 전북 위도, 아래로 청산도를 지나 고흥 나로도까지 나갔다.

어불도에서 삼치가 결국 일을 내고 만다. 새마을사업이 한창이던 1977년 어불도의 높은 소득이 눈에 띄어 청와대에 높으신 양반에게 보고가 되었다. 작은 마을의 새마을지도자는 청와대까지 들어가 대통령에게 어불도의 경제동향을 보고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주민들의 숙원사업인 '전깃불'을 켤 수 있었다. 그 동안 주민들은 자가발전으로 저녁이면 겨우 밥을 먹고 자야 했다. 생각해 보면 모두 '삼치' 덕이 아니고 무엇인가.

허물어진 당집 겨우 명맥만 유지되다

구압산에 오르면 어란리 포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가 좌우로 쌍을 이루고 있는 바다 위에 집이 지어진 듯 착각을 하게 만든다. 산 능선을 개간해 만든 구릉 밭에 마늘이 제법 모양을 갖추었다. 따뜻한 날씨에 주민들은 마늘밭에서 풀을 뽑고, 고추를 심기 위해 밭을 일군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은 묵은 산길을 헤치며 당집을 찾아 나섰다. 한걸음 옮길 때마다 청미래덩굴이 다리를 붙잡고 억새가 얼굴을 간질인다. 능선을 넘어서자 한눈에 당집이 들어온다. 돌담은 곧 무너질 듯하고, 출입구는 찾을 수 없다. 어렵게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지난해 사용하고 잘 갈무리해 좋은 제기들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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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압산 양지바른 기슭 당집에 보관된 제기들.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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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불도 당집, 지금도 정월이면 인근 사찰의 스님을 모시고 당제를 지내고 있다. 삼치잡이가 한창일 때는 풍어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제가 엄격하고 성대하게 치뤄져다. ⓒ 김준


삼치잡이가 한창이던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엄격하고 정성스럽게 당제를 지냈다. 정월 대보름 무렵, 마을 주민들 중 깨끗한 사람을 뽑아서 풍어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미황사에 계시는 스님을 모셔다 당제를 지내고 있다. 마을제의에 스님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연유가 있다.

우선은 사람들이 당제를 지내는 제관으로 뽑히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아내와 잠자리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은 물론, 겨울에 차가운 당샘에서 목욕을 하고 음식을 준비해야 한다. 심지어 산달이 가까운 산모를 마을 멀리 내보내 아이를 낳게 하기도 했다. 정성스럽게 제를 지내도 마을에 좋지 않는 일이 생기거나 고기잡이가 시원찮으면 그해 제를 지낸 사람에게 의혹의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이러다 보니 서로 당제를 모시는 제관으로 뽑히는 것을 꺼려했다. 다른 이유도 있다. 당제를 위해 설명절이 지나면 집집마다 풍물을 앞세우고 돌며 제비를 걷었다. 농악은 제를 지내는 동안에도 반드시 필요했다. 하지만 농어촌 인구가 감소하고 고령화되면서 쇠를 치고 장구를 멜 사람을 찾기 어려워졌다. 심지어 당제를 구경하거나 조사하기 위해 찾아간 외지인들이 북 장구를 메야 할 정도다.

그런데 스님을 모시는 경우 이런 문제는 깨끗이 해결된다. 스님과 마을이장이 당집에 올라가 간단하게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해남 송지에 몇 마을은 오래 전부터 스님을 모시고 있으며, 남해지역도 많은 마을에 같은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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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불도와 어란진을 오가는 새마을호. ⓒ 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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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란진으로 놀러 나오는 어불도 초등학생 ⓒ 김준


마을 뒷산 당집에서 내려다 본 마을모습은 너무 예쁘다. 돌담으로 둘러쳐진 당집은 작은 부엌과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엌에는 질그릇 물동이와 투가리 그리고 땔감 나부랭이가 뒹군다.

방안에는 떡시루, 사기 밥그릇과 대접, 접시 등이 잘 정리되어 있고, 옆에는 두 개의 촛대가 놓여 있다. 비닐로 창호를 막은 문으로 햇볕이 들어온다. 그 빛을 받고 덩굴식물이 방문을 타고 오른다. 천장에는 앙상하게 서까래가 몰골을 드러내고 있다.

어란진에서 어불도까지는 10분거리. ‘새마을호’라는 작은 객선이 하루에 7회 운행을 하고 있다. 섬 주민들은 하루 빨리 뱃길 대신 연륙을 원하지만 쉽지 않다. 섬 인구가 적어서 예산을 얻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초등학생이 9명에 중고등학생이 10여명에 이른다. 섬 주민들의 불편함보다는 '아이 속살처럼 예쁜 작은 섬이 망가지면 어떡하나'라는 생각을 하는 것을 보면 나도 '육지 것'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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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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