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48회

등록 2007.03.09 08:20수정 2007.03.09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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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제를 풀어주는 일이 뭐 그리 위험한 일이라고 그러는 것이오.”

능효봉이 딴소리 말라는 듯 대답하자 중의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어느 정도 정신을 수습하고는 조그만 틈이라도 비집고 들어갈 기회를 노렸다.


@BRI@“그 녀석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

“한 칠년 가까이 같이 지냈으니 웬만한 것은 어느 정도 아오.”

“그렇군… 그 동안 비영조에 몸담고 있으면서 그 녀석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 네 덕이었겠군. 새끼 호랑이 두 마리를 회의 내부 깊숙이 두고 있었다니… 그러고 보니 네놈도 정말 지독한 놈이로구나.”

“……?”

“네 부친이 옹호하고 있었던 동림당(東林黨)의 잔당들을 대부분 네 손으로 처리했으니 말이다.”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이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능효봉의 눈 깊숙한 곳에 미세한 아픔의 흔적이 스치고 지나갔다. 분명 그것은 아픔이었다. 능효봉이 아무리 노련하다 해도 아직 감정을 완벽히 조절하기에는 나이가 아직 젊었다. 그것을 중의가 놓칠 리 없었다.


“어쩔 수 없으니 그렇게 말은 하겠지.”

자꾸 능효봉의 마음을 흔들어 놓아야 했다. 일방적으로 당하는 중의 입장에서는 능효봉에게 하나의 틈을 발견한 셈이었다.

“하지만 너는 또 다시 지금 큰 실수를 범하려 하고 있다. 네가 그 녀석의 금제를 풀어주라는 말이… 더구나 그 녀석에게 구양단을 복용시키려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 실수가 될지 생각해 보았느냐?”

능효봉을 생각해 주는 듯한 은근한 협박이었다. 허나 잠시 아련하게 밀려온 아픔을 지워버린 능효봉은 개의치 않고 오히려 중의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물었다.

“그 녀석이 보주의 아들이란 사실은 언제 안 것이오?”

보였던 틈이 파고들기도 전에 막혀버렸다. 나이답지 않게 노련했다. 중의는 새삼 눈앞에 있는 능효봉의 모습에서 그리도 두려워하던 과거 그 천룡의 모습이 겹쳐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짐작만 하고 있었지. 회에서는 확실한 증거를 찾기 위해 노력했고, 아마 그 조사 결과가 오늘쯤 만보적에게 전달 될 것이다. 하지만 노부는 그 녀석을 치료하면서 운중의 자식임을 확인했다.”

“어떻게?”

“그 녀석의 몸에는 두 가지 이질적인 내력이 잠재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운중의 단원심공이었다. 그리고 심인검을 구성의 수위까지 익혔다는 것까지도 확인했지.”

“그래서 금제를 가해놓은 것이었소? 보주에게 도대체 무엇을 강요하고 싶어서?”

능효봉의 빈정대는 말투에 이제는 익숙해진 듯 중의는 대꾸를 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이어갔다.

“또 한 가지는 노부 역시 모르는 기운이었지만 매우 위험하고 강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불같이 뜨겁고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위맹한 것이었다. 단원심공과는 매우 이질적인 그 기운은 절대 단원심공과 융화할 수 없는 것이지. 그러나…!”

중의는 말끝에 힘을 주면서 일단 끊더니 찻잔을 입에 대었다.

“구양단을 복용시킨다면 달라질 수 있다. 구양단의 약효로 두 가지 기운이 융합하게 되면 노부 역시 그 결과를 예상할 수 없다.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 준 꼴이 될 것이고, 더구나 구양단의 보양(補陽) 작용으로 내력 역시 한 단계 올라서게 될게야. 그 결과가 어찌될지는 노부 역시 짐작하기 어렵다.”

그래도 구양단을 복용시키라고 부탁을 할 것이냐 하는 말투였다. 사실 이 말은 능효봉의 마음을 떠보는 것이었다. 능효봉이 짐짓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호오… 그 녀석이 초절정고수로 환골탈태(換骨奪胎) 할 수 있다는 말이구려.”

“어떠냐? 그 녀석의 금제만 풀어주는 것이?”

은근히 회유하는 목소리에 능효봉은 짐짓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다시 또 중의가 부추겼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나중에는 네놈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오히려 네가 당할 수 있다.”

하지만 능효봉은 곧 고개를 흔들었다. 남들은 모른다. 서른여섯 해를 살면서 한번도 잠을 두시진 이상 자 본적이 없다. 복수의 대상은 중원 하늘에 떠 있는 다섯 개의 찬란한 별이었고, 무수히 크고 작은 별들이 그들을 감싸 돌고 있었다.

과거 부친의 무공수위를 뛰어넘지 못한다면 다섯 개의 별을 따기도 전에 스러진다. 운중보주는 분명히 그것을 각인시켰고, 직접 보여주었다. 당시 아홉 살의 어린 꼬마는 그 의미도 알지 못했고, 정확히 보지도 못했지만 머리 속에 남은 그 영상은 그가 고련하면서 무공수위가 높아짐에 따라 그 의미를 깨닫게 해주었다. 지금도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때가 되었다고 느꼈을 뿐.

“아주 우습게 들리겠지만 현 중원에서 나를 쉽게 이길 인물은 없소. 그 정도 자신이 없다면 내가 운중보에 들어올 생각을 했겠소? 그 녀석에게 구양단을 복용시켜 주시오. 나중에라도 그런 정도의 적수 하나쯤은 있는 것이 덜 적적하지 않겠소?”

정말 나중에 설중행과 승부를 가르는 일이 있을지라도, 그래서 그에게 패한다 할지라도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해주는 것이 자신의 도리였다. 그것이 자신의 가슴을 짓누르는 빚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십칠 년 전 그 녀석의 부친이 자신의 손을 잡고 중원을 돌아다닐 적에 자신에게 베푼 많은 것을 갚을 수 있는 길이었다. 그래야만 보주에게 떳떳하게 목숨을 내놓으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큰 실수하는 거야. 나중에 너는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게야.”

중의의 말에 능효봉은 피식 웃었다.

“어차피 나는 살아오면서 너무나 많은 실수를 했소. 우리 인간은 알든 모르든 무수한 실수를 하게 되오. 거기에 하나쯤 더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무에 있고, 또 달라진다 한들 또 어떻소?”

장난스럽게 말은 하고 있었지만 이것이 능효봉이 살아오면서 가지게 된 삶의 철학이었다. 모든 일을 억지로 꿰맞춘다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완벽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해지려고 추구하는 것이 인간이라지만 그 역시 욕심일 뿐이다. 종래에는 그 욕심으로 인해 더 큰 실수를 하게 되고 자신을 파멸로 이끌게 되는 것이다. 그런 것이 삶이라면 차라리 실수를 인정하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 일인 것이다.

“좋다. 하지… 해주지… 네놈이 원하는 대로 그 녀석을 완벽하게 만들어주지. 다만 한 가지만 마지막으로 묻자.”

중의는 순순히 약속했다. 어차피 구룡과 동정오우는 견원지간(犬猿之間)과도 같아서 한 우리 안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다. 어쩌면 그 녀석을 나중에 이용할 수 있을지 모른다.

“무엇을 말이오?”

“네놈 둘이서 혈간을 살해한 것은 맞지?”

“명령을 내린 사람이 추태감이었고, 그것을 꼬드긴 사람이 당신인 것과 마찬가지요.”

“지금 네놈을 보니 충분한 능력이 있음은 인정하지. 그러나 그렇다 해도 혈간은 그리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니다. 네놈들이 기습하기 전에 먼저 혈간의 척추를 가른 놈이 누구냐?”

능효봉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툴툴거리며 웃었다.

“내가 알 것이라고 생각하오? 아니 안다고 해도 말해줄 것 같소?”

아주 애매한 모습이었다. 노련한 중의마저도 이놈이 정말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중의는 한참이나 능효봉을 바라보고 있다가 탄식처럼 말을 뱉었다.

“너는 운중의 심인검을 익혔겠구나….”

그 말에도 역시 능효봉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대답 없이 느긋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도 그가 심인검을 익히고 있는지 아닌지 파악할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중의는 중의대로, 능효봉은 능효봉대로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할 비밀만큼은 상대가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에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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