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 선바위이정근
무학대사 마음의 중심 추는 선바위에 있었다. 신라 천년, 고려 오백년을 이어온 구심점은 불교라고 믿고 있었다. 고려왕조 말, 탐욕에 물든 일부 승려들에 의하여 불교가 고려조정에 끼친 패악도 없지 않았으나 그래도 불교가 국가의 버팀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살생을 금하는 불타의 가르침이 도성 안에 살아 있어야 서로 죽고 죽이는 살생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호국불교정신이 도성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전쟁의 참화를 피할 수 있고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구가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 위하여 도성 안에 사찰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고 장삼을 걸치고 화평의 춤을 추고 있는 듯한 선바위를 도성 안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 무학의 염원이었고 계책이었다. 하지만 정도전의 생각은 달랐다. 건국이념으로 삼은 척불숭유(斥佛崇儒)라는 낱말이 말해 주듯이 불교는 척결의 대상이었다.
“꼭 도읍을 옮기려면 이곳이 좋습니다.”
남경에 기울고 있는 왕의 심중을 읽은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주억거리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하륜이 홀로 말했다.
“산세는 비록 볼 만한 것 같으나 지리의 술법으로 말하면 좋지 못합니다.”
하륜은 무악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시큰둥했다. 어제 조운을 앞세워 무악산을 예찬하던 하륜의 예기를 경청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산세가 빼어나구려. 이렇게 좋은 터를 추천한 왕사의 얘기를 더 듣고 싶소."
"일국의 도읍지는 천년사직을 기약해야 올을 줄 아뢰옵니다. 나라가 천년세세 태평성대를 구가하려면 나라 안의 혼란도 없어야 하겠지만 외침이 없어야 합니다."
나직하지만 힘이 있는 목소리였다. 삼각산을 바라보며 호흡을 가다듬은 무학대사는 말을 이어갔다.
"우리나라는 바다 건너 왜구로부터 시달리고 있습니다. 동쪽 바다 건너 왜국(倭國)의 발호를 잠재우기 위해서는 인왕을 주산으로 하고 북악을 좌청룡, 목멱(남산)을 우백호 삼아 정전(正殿)을 동향으로 앉혀야 할 것이라 아뢰옵니다."
앞날을 내다보는 무학대사의 능력이었을까? 우연의 일치였을까?
무학대사의 눈은 예리했다. 남해안에 상륙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들이 왕도(王都) 코 앞 강화도까지 출몰하여 조운선을 약탈할 정도로 커버린 왜(倭)를 위협세력으로 보는 것은 현실감각이 있었다. 하지만 고려 왕국을 속국으로 취급하던 원나라와 명나라 즉, 대륙세력을 침략세력으로 보지 않고 당연시하는 사대(事大) 시각은 아쉬웠다.
또 하나 왜구쯤이야 대단치 않게 보는 이성계의 심중을 읽지 못했다. 지금은 역성혁명에 성공하여 새 왕국의 국왕으로 등극하였지만 고려의 청년장교시절 이성계가 백성들로부터 박수를 받게 된 것은 남해안에 상륙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를 격퇴한 것이었다. 이성계에게 왜구는 위협국가가 아니라 토벌의 대상이었다.
"동향(東向)이라…? 기이하군요. 이유를 말씀해 보시오"
북악산과 삼각산을 지긋이 바라보던 이성계가 무학대사에게 되물었다.
"동향으로 된 정전 옥좌에 성상께서 앉아계시면 문무백관들이 성상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게 됩니다. 왜국 역시 성상께 머리를 조아리게 되는 형국이 되는 것 입니다. 용트림하는 왜국의 기세를 꺾으면 천년세세 태평성대를 이룩할 것이오. 그 위세를 잠재우지 못하면 국난에 처하여 나라의 명운이 위태로울 것입니다"
무학대사의 목소리는 설법하듯 나직했지만 확신에 차 있었다. 훗날 임진년의 조선 침공과 국권찬탈. 그리고 오늘날의 일본을 생각해보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로부터 200년 후, 1592년 조일전쟁(임진왜란)이 터졌다.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必生卽死 死必卽生)는 일념으로 고군분투 했지만 국토는 유린되었다. 선조 임금이 창덕궁을 탈출하여 의주로 몽진 떠나고 조국의 명운이 백척간두에 걸렸을 때 백성들은 무학대사의 예지력에 탄복했고 아쉬움에 탄식했다. 앞날을 내다보는 무학대사의 능력이었을까? 우연의 일치였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문화면에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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