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61회

등록 2007.03.28 08:21수정 2007.03.28 08:21
0
원고료로 응원
아니 너무나 기쁜 일이었다. 어제 중의의 입에서 운중의 혈육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일말의 기대를 했던 성곤에게는 무엇보다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그… 그랬군… 자네가 말했듯이… 운중은 황용이 유산하자 회운사태와 정을 통했다는 말이군. 허허…."


성곤의 얼굴에 의구심이 가시며 기분 좋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허헛… 어째 불가에 몸담은 여인의 눈길치고는 운중을 바라보는 눈빛이 다르다 했지…."

성곤은 정말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자신이 관여하지는 않았다 해도 알고 있었던 사실만으로도 운중에게 죄를 지었다고 평생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성곤은 다소 마음의 부담을 던 느낌일 것이다.

"알려주어서 고맙네. 내가 자식을 얻은 기분이군. 아니 내 아들이지. 암암… 그렇지. 그 아이가 현무각에 있는 것인가? 어서 가봐야겠구먼. 허헛헛…."

너털웃음을 절로 흘리는 성곤이 너무나 기분 좋은 것과는 달리 중의는 내심 씁쓸했다. 저렇게 좋아하는 단순한 친구가 부럽기도 했다. 어차피 어떻게 살든 한 평생인데 저렇게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았다.

"아직 대놓고 그럴 처지가 아니네. 잠시 지켜보며 내버려두게. 또한 그 아이 역시 지금은 잠시 쉬어야 할 걸세."


명령에 의해 움직였던 아니던 간에 혈간을 죽인 인물이 분명하다. 그런 사실이 밝혀지면 철기문에서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성곤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중의의 마지막 말에 눈을 치켜떴다.

"무슨 말인가? 그럼… 자네는 오전 내내 그 아이와 만나고 있었던 것인가?"


아침 내내 어디론가 사라진 이유가 그 아이를 만나기 위한 것이었던가? 그런 일이라면 자신을 불러 동행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중의를 탓하려다가 중의의 입에서 나온 말에 그는 입에 함박만큼 벌어졌다.

"구양단을 한 알 먹였네. 그리고 한나절 동안 생사금침(生死金針)을 사용해 벌모세수시켜 주었네."

성곤이 갑자기 중의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의 얼굴에는 감격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자네는? 고맙네. 정말 고맙네. 역시 자네는 친구네. 누가 뭐라 해도 자네는 진정한 친구네."

어린아이가 처음 빙당호로를 받아들고 좋아하는 모습과도 같았다. 손을 잡고 마구 흔들어대는 성곤을 보며 같이 웃고는 있었지만 중의의 속내는 여전히 씁쓸했다. 어차피 성곤은 단순한 친구라 자신의 말을 그대로 운중에게 전할 터였다.

운중보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운중에서 비롯되었다는 믿음에는 흔들림이 없었지만 이것으로 최악의 경우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또 다른 구멍을 파 둔 셈이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그리고 자의든 타의든 간에 최소한 자신의 혈육에게 은혜를 베푼 자신에게 칼을 들이대지는 않을 것이고, 또한 운중의 행보를 잠시 느긋하게 하거나 주춤거리게 하는 효과도 있을 터였다.

자신에 대한 운중의 경계심도 많이 늦추어질 것이고, 행보에 따른 제약도 여러 가지 편해질 터였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것은 지식이나 능력보다는 삶에 대한 가치관이 더 중요했다. 위기가 닥쳤을 때 그것에 대해 불평을 하거나 원망을 한다면 그는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다. 맞서 부닥치다가 결국 그 위기로 인하여 파국을 맞는 것이다.

허나 그 위기를 정확히 파악하고 올바르게 대처한다면 오히려 뜻밖의 기회가 될 수 있고, 최소한 그 위기에 피동적으로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닌 능동적으로 상황을 변화시켜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바꾸어놓을 수 있는 것이다.

"좀… 쉬어야겠네."

성곤의 손을 슬며시 놓으며 더욱 피곤한 기색을 띠었다. 정말 구양단의 약효를 단시간 내에 흡수하도록 하는 일은 진력을 과도하게 소모시키는 일이었다. 더구나 설중행의 몸에 상충되어 흐르던 두 가지 이질적인 기운을 융화시키는 일은 중의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능효봉이 바로 옆에서 중의가 시키는 대로 진력을 사용하는 일은 도맡아 했지만 그래도 중의로서는 입안에 백태가 낄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 이렇게 시술해 본 것도 거의 십여 년 만인 것 같았다. 성곤이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듯 중의의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게… 내 그 누구도 저녁까지 이 방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겠네. 아랫사람 시킬 것도 없이 내가 직접 가서 추태감에게 전하지. 푹 쉬게나."

성곤은 너무나 기분이 좋은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중의가 일어나 침실 쪽으로 가는 것을 보며 성곤은 뭐가 그리 급한지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74

확실히 자신도 놀랄 정도로 기력이 충만해져 있었다. 느낌 자체가 달랐다. 뭐랄까? 기혈의 움직임은 고요하고 매우 묵중한 느낌이 들 정도였지만 느릿하고 정확하게 흐르고 있었다. 언제나 몸속에 잠재된 두 가지 기운의 상충은 이제 느낄 수 없었고, 운중보에 들어와 고통까지 안겨주었던 가슴의 통증이나 뒷목의 뻣뻣함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처음 느껴보는 기혈의 움직임이었다. 고요한 가운데서도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내력이 몸속에 가득 차 있는 느낌이었다. 확실히 중의라는 신의의 의술은 명성만큼이나 신묘했다.

"고맙소."

오히려 약간 피곤한 듯 보이는 능효봉에게 던진 말이었다. 능효봉은 힐끗 설중행을 보더니 씨익 웃었다.

"고맙다? 그래 고마워 할 만하지. 하지만 분명히 알아둬. 네가 고마워할 주체는 바로 나야. 중의가 아니고…."

"……?"

그렇지 않아도 중의에게 고마워하고 있고, 만나면 정중하게 고맙다고 인사를 할 작정이었다. 간혹 치료 도중에 의식을 회복한 적도 있었는데 능효봉과 중의가 자신을 치료해 주기 위해 대화하는 것을 들었던 것이다.

"거래였다. 아주 위험한 거래를 한 셈이지."

거래란 대가를 주고받는 것을 말한다. 중의가 설중행을 치료하여 준 것은 능효봉이 그만한 대가를 치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위험한 거래란 말은 능효봉에게 아주 심각하고 중요한 것으로 그 대가를 치렀다는 말이다.

"네놈은 상관할 것 없어.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중에라도 네가 중의에 대해 알량한 마음으로 어떤 일이든 양보할 필요가 없다는 거야. 물론 나에게도 역시 마찬가지다. 만에 하나 너와 내가 칼을 맞대는 일이 있더라도 그런 것 따위는 잊어버려."

그럴 일이 무에 있을까? 그런 일이 있으면 자신은 깨끗하게 능효봉에게 양보할 것이었다. 지금까지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능형!"

"사고나 치지 마. 주제도 모르고 의리 따위나 내세워 무모한 짓이나 하는 네놈의 뒤치다꺼리하기도 이젠 지겹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설중행은 능효봉이 지금까지 자신을 위해 얼마나 신경을 써 주었는지 알고 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른다. 그를 만난 이후로 그는 눈에 보이지 않게 자신을 돌봐주었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 능효봉은 중의에게 정말 엄청난 대가를 치렀을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도 해야겠소?"

설중행에게도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중원천지 능효봉 뿐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능효봉은 설중행의 형과도 같은 존재였다.

"관둬. 어차피 네놈이 또 사고 치면 보고만 있을 수는 없을 테니까. 미안한 것은 네놈이고, 그래도 뒤치다꺼리해야 하는 것은 내 몫이니까."

사람의 관계란 참으로 야릇한 것이 매우 불공평해 보이는 관계가 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와 저 인생의 후반기를 풍미하게 될지도 모를 무협작품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천지는 만인의 것이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민박집에서 이런 이불을 덮게 될 줄이야 민박집에서 이런 이불을 덮게 될 줄이야
  2. 2 나무 500그루 가지치기, 이후 벌어진 끔찍한 일 나무 500그루 가지치기, 이후 벌어진 끔찍한 일
  3. 3 81분 윤·한 면담 '빈손'...여당 브리핑 때 결국 야유성 탄식 81분 윤·한 면담 '빈손'...여당 브리핑 때 결국 야유성 탄식
  4. 4 윤석열·오세훈·홍준표·이언주... '명태균 명단' 27명 나왔다 윤석열·오세훈·홍준표·이언주... '명태균 명단' 27명 나왔다
  5. 5 행담도휴게소 인근 창고에 '방치된' 보물 행담도휴게소 인근 창고에 '방치된' 보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