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62회

등록 2007.03.29 08:10수정 2007.03.29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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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동물적인 본능으로 인하여 일방적으로 주는 존재와 무조건 받는 관계이지만 아무런 혈연관계도 아닌 사람들의 관계에 있어서도 일방적으로 주고 무조건 받는 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매번 탓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도와주는 그런 관계 말이다.

"좀 쉬어야겠다. 혼자 나가서 사고치지 말고 아직 몸도 완전치 않을 테니 조용히 운기나 하고 있던지 해. 저녁시간까지는 잠이나 자 둬야겠어."


말과 함께 능효봉은 의자에서 일어나 침상 쪽으로 걸어갔다. 그 때였다. 문이 열리며 풍철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긴 뭘 자… 실컷 돌아다니고 와서 잠이나 퍼 자겠다는 거야?"

풍철한이 얼굴에 안도하는 기색과 웃는 모습을 보였다. 그의 뒤로 함곡과 일행 몇 사람이 보였다.

"잠자기는 다 틀렸군."

능효봉이 투덜거리며 침상에 걸터앉았다.


"언제 돌아왔어? 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사고 친 것은 이미 알고 있을 터. 그래도 무사히 돌아와 주어 다행이라는 표정이 역력하다. 어느새 동료의식이란 것이 생긴 것일까?


"뭔 낯을 들고 '나 왔소' 하겠소?"

"그래도 양심은 있는 모양이지? 어디 있다가 온 거야?"

이미 어제 백호각에서 있었던 일은 좌등에게 들었던 터였다.

"이목이 깔려있는데 저 자식을 덜렁 메고 돌아올 수는 없잖소. 좀 쉬었다 오는 길이오."

"오히려 능대협이 피곤해 보이는구려."

함곡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어차피 초죽음 된 설중행을 데리고 추적자들의 이목을 따돌리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더구나 한나절 만에 설중행을 멀쩡하게 만들어 데리고 들어온 것을 보면 능효봉이 얼마나 수고를 했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고, 또한 그럴 수 있는 그의 능력이 놀라웠다.

"잠을 자지 못했더니 그런 모양이오. 헌데 저 아이는 여기에 웬일이오?"

선화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홍교를 보고 물은 말이었다.

"오늘부터 여기에 데리고 있을 생각이오."

함곡의 말에 능효봉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충 짐작 가는 일이었다. 혐의가 있는 자의 신변을 확보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능효봉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차피 지금 자기는 틀렸고… 식은 만두라도 남아 있소? 두 끼를 걸렀더니 배가 등에 붙을 지경이오."

"하하… 이곳은 좁으니 일단 나갑시다. 너는 아이들에게 간단하게 식사준비라도 하라고 전해라."

함곡의 말에 선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홍교를 데리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

설중행과 능효봉이 간단하게 요기를 끝내는 동안 함곡이 간략하게 지난밤부터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 설명했다. 추산관 태감이 오전에 운중보에 입보했다는 사실에 능효봉은 잠시 곤혹스런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말은 없었다.

추교학이 쇄금도가 살해된 직후 현장에 들렀다는 함곡의 설명에 아주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과정 역시 추교학의 말이 사실이라면 능히 그를 흉수로 몰려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제가 궁소저를 다시 만나봐야겠군요."

이제 진가려의 거처 비밀통로에 있었던 서향의 주인은 궁수유일 가능성이 높았다. 설중행의 말에 함곡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점심식사 후에 궁소저 쪽에서 설소협이 와주었으면 한다는 전갈이 왔소. 되도록 설소협 혼자 와주었으면 한다는 부언이 있었소."

"저 녀석 여복은 많군. 어제 보주의 수양딸도 와주길 바란다고 하더니만…."

능효봉이 핀잔을 주듯 말했다. 그는 젓가락을 놓고는 길게 하품을 했다. 어젯밤 꼬박 세운 탓에 졸리기는 한 모양이었다.

"잘 되었군… 혼자 갔다 와. 나는 아무래도 잠시 눈이라도 붙여야 될 테니 말이야."

피곤한데다가 식사까지 했으니 더욱 졸릴 만도 할 터였다.

"상황이 아주 미묘하고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소. 어제 용봉쌍비를 설소협에게 드린 것은 장난이 아니었고, 우리 일행을 이끌어갈 사람은 설소협임을 명심하시오. 설소협이 혼자 몸이 아님을 아시고 어젯밤처럼 무모한 혈기로 움직이시지 않았으면 하오."

함곡이 진중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 부분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했소. 어제 얼떨결에 용봉쌍비를 받기는 했으나 어찌 소생이 여러분들을 이끌 수가 있겠소? 경험도 부족하고 능력도 여러분들에 비해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모자라오. 이것은 그저 단순하게 예의로 겸양하는 것이 아니오."

설중행은 자신을 바라보는 일행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그들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더구나 소생은 그저 풍대협의 도움을 받고 여차하다보니 휩쓸려 운중보에 들어왔소. 그런 소생이 무엇을 알겠소? 지금도 왜 함곡 선생과 풍대협께서 소생을 앞에 내세우려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소."

다른 이유가 있지 않다면 자신을 앞에 내세울 까닭이 없다. 뛰어난 머리와 예리한 판단력은 분명 함곡에게 뒤지고, 경험과 직감에서는 풍철한에게 턱없이 모자란다. 능효봉에게도 마찬가지.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는 설중행에게 일행의 수장이 되라함은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란 말이었다.

풍철한이 함곡을 바라보았다. 함곡의 판단은 틀린 적이 없지만 이 부분은 그 역시 들은 바도 없었고,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막혀있는 돌파구를 찾기 위한 방편의 일환이 아니었나 생각하고 따라주었다.

"일단 설소협께서는 궁수유 소저에게 다녀오시오. 그 이유는 저녁에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리다. 다만 한 가지 설소협은 이 운중보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고, 운중보 안에 있는 사람들 중 몇 사람들과는 아주 중요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소. 따라서 이 친구와 내가 좌충우돌 뛰어다니는 것 보다는 설소협이 나서는 것이 조사에 훨씬 효과적일 것이란 판단 때문이오. 이 정도면 일단 대답이 되었소?"

함곡의 판단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역시 설중행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그저 풍철한을 따라 들어온 범부(凡夫)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중요하고 심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상만천이 왜 설중행을 그리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려 하는지? 또한 보주의 딸인 우슬이 설중행을 기다렸다는 듯 맞이해 반드시 다시 찾아오라고 했는지? 궁수유 역시 설중행과 이미 알고 있었던 사이인 듯 하고… 그것은 사실 설중행마저도 느끼고 있었던 일이었다.

"일단 다녀오지요. 궁소저를 조사함에 있어 특별히 알려주실 것이 있으신지요?"

"없소. 모든 것은 설소협의 판단과 직관으로 조사해 보시오. 나는 설소협이 가진 능력을 믿고, 그것이 곧 빛을 발하리라 확신하고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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